기획특집

[FF Magazine] Gates - 작은 마음에서 큰 꿈으로, 세계를 향해 도약하는 열정 / 김광희

  • 10.01.25 / 운영자


TURNING POINT
학창시절, 무엇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있는 특별한 기억은 오직 음악이다. 음악을 통해 사람을 사귀었고, 음악을 하며 쓴맛도 봤지만 행복했다. 학원비를 받아다 몰래 음악에 투자하던 고교시절도,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베이스기타를 맡아 군 입대 전까지 배곯아가며 공연에 몰두하던 대학시절도 그에게는 소중한 추억이다. 그것이 가장 쉬운 일이며 가장 원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중간고사도 빼먹고 공연에 몰두하던 베이스기타리스트 김광희는 긴 머리를 자르고 입대하며 2000년 10월 동티모르로 파견되어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덥지만 비교적 견딜 만했던 날씨, 풍족했던 보급품 덕에 낯선 땅에서 하는 군 생활이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았다. 주말이면 부대원들과 인근의 바닷가로 놀러 가 수영도 하고 마을의 어린아이들에게 과자도 나눠주며 나름의 뿌듯한 시간을 보내던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한 8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일행의 가방을 훔쳐 달아난 것이다. 물론 마을 아이들에게 나눠주려 가져갔던 물건들이었지만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다음 주, 또 다시 수영을 하러 해변에 나가면서 더 많은 양의 음식을 챙겼다. 부족한 아이들에게 조금 더 나눠준다는 마음이었다. 그곳에는 가방을 가지고 갔던 여자아이도 있었다. 예의주시하면서도 모른 척하던 그는 같은 아이에게 또 한 번 가방을 털렸다. 아무리 어려워도 자신만을 위해 도둑질하는 아이가 못마땅했다. 그 일이 잊힐 때쯤 그의 부대는 인근지역을 수색하는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어느 외딴 마을에서 가방을 훔쳐간 아이와 마주쳤다. 아이는 그를 보고 눈물을 터뜨리며 집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의 거처로 그를 이끌었다. 아이의 오빠가 병상에 누워 죽어가고 있었고, 훔쳐갔던 음식들은 고스란히 병상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아이에게 품었던 나쁜 생각들이 그를 더욱 원망스럽게 했다. 그다음부터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보급품까지도 어린이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난 부대에서 나오는 식사로도 세끼를 해결하니까’라는 생각에 무조건 퍼주기 시작했다
 
CHECK POINT
전역 후에도 자신의 진로에 대한 명확한 목표는 없었다. 다만 국제기구에서 국제분쟁과 세계를 위해 일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앞섰다. 그러나 자료가 빈약했다. 당시엔 앞길을 터놓은 선배도, 정보를 공유하던 블로그 등도 미비한 것이 현실이었다. “요즘 UN의 인턴십이나 프로그램, 자원봉사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 비약적으로 눈에 보입니다. 제가 관련 카페에 처음 가입했던 2002년 당시 1,000여명 남짓이던 회원수가 현재는 45,000명을 넘었으니 말이죠.”
UN의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도 많이 봐왔으나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던 화려한 경력과 이력을 갖고 있었고, 정보를 공유해주지도 않았다. 무조건 발로 뛰었다. 그는 학부 시절부터 국내 기구의 봉사활동을 통해 UN 인턴십의 기반을 다졌다. ‘지구촌 나눔 운동 NGO'의 대학생 연합회로 들어가 처음 접했던 실무가 행사장 주차관리였다. 내심 사무국에서 유창한 영어, 혹은 불어나 서반아어로 실무진에게 업무를 배우며 큰 경험을 쌓는 동기들이 부러웠다. “처음엔 좌절감에 휩싸였죠. 열심히 준비했고 많이 노력해서 겨우 들어오게 됐는데 주차관리나 했으니까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영어도 부족하고 그만한 경력이나 이력도 갖추지 못했던 저였습니다. 무기라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배짱 하나였으니까요. 하지만 바닥에서부터 올라간다는 마음으로 차근차근 배워 사무국에서 실무진과 함께 일할 수 있었죠.”

그 역시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실패가 주는 좌절이나 후회를 느끼는 사람이다. 하지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때로는 실패를 더욱 성장하는 발판으로 다지는 용기라는 큰 무기를 가지고 있다. 누구나 그럴 수 있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왜 실패했나?’보다는 ‘어떻게 하면 다음에 성공할까?’라는 생각이 그를 지탱해주는 가장 큰 신념이라고 한다. 일전에 어느 고등학생에게서 이메일을 한 통 받은 적이 있다. 그 여학생은 자신이 꿈꾸는 미래에 가장 부합되는 인물이 광희라고 밝혔다. 자신도 누군가의 롤모델이라니…… 가당치 않다고, 아직은 부족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싶다는 학생들이나 후배들의 꿈에 대해 책임감을 느꼈고 더욱 정진하는 계기가 됐다.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사회적 책임이랄까? 어깨가 무거웠다. 그의 부모님도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아들이 평범한 직장에 들어가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길 원했지만 그러기엔 한길만 보고 뛰어온 지난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최근 국제정치과 석사논문이 통과되었고, 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4월에는 전액 장학혜택을 받으며 코스타리카에 있는 UN 산하 U PEACE 대학원에서 수학할 예정이다. 더욱 좋은 것은 19개월의 코스(국제분쟁 및 평화 전공) 중 11개월간의 정규과정을 마치면 나머지 기간 동안에는 UN의 각 사무국으로 파견되어 실무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인으로는 역대 세 번째 U PEACE 학생이 됨과 동시에 자신에게 있어서도 큰 기회를 갖게 되었다. 수 차례의 국제행사와 인턴십을 겪으며 그가 매번 느낀 것이 있다. 전 세계의 전문가들과 일을 하다 보니 열정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광희식 사고’를 더하니 전 세계의 뛰어난 인재들과 경쟁하고 그 벽을 넘어서고 싶은 도전정신이 싹트기 시작했다.

ILO(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 인턴십 등의 경험이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겐 더없이 소중한 경험과 재산이다. 바로 ‘실패’와 ‘좌절’을 통해 자신을 단련할 수 있었고 더 높은 곳을 향해 도약하는 에너지의 근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과정을 호되게 겪은 탓일까?
그는 현재 UN 인턴십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서로의 경험과 생각을 공유하는 인터넷 카페의 운영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정보의 공유를 아끼던 동기들과 달리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과 정보를 나누며 시너지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사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제공되는 정보는 상당히 미비하기 짝이 없다. 올해로 UN에 가입한지 20년이 되는 나라로 볼 때, 상당히 부끄러운 현실이다. 이에 반해 그들이 운영하는 카페에는 비교적 방대한 정보와 무엇보다 도움이 될 만한 선배들의 ‘경험’이 있다. 더욱 상세한 정보와 생생한 경험담은 http://cafe.daum.net/unitednations
에서 확인할 수 있다.

 
POINT OF VIEW
김광희는 대학 졸업 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 재학 시절인 2008년 9월부터 2009년 3월까지 UN의 특별기구인 ILO 인턴십에 채용되어 ILO 본부가 있는 제네바에서 근무했다. 쉽게 말해 ILO는 국제노동기구다. 1919년 설립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글로벌 기구로 UN이 창시되었던 1945년보다 훨씬 앞서 설립되었다. 노동이라는 행위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며, 모든 이에게 균등하게 노동을 제공해야 한다는 취지로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활약한다. UN이 설립될 당시 ILO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UN의 산하기구가 아닌 특별기구로 운영되고 있다. 노동문제가 발생한 지역에 파견되어 분쟁을 조정하는데, 대의제를 통해 각국의 대표가 의사결정을 하는 다른 국제기구와 달리 분쟁의 당사자인 사측과, 노동자 측, 정부의 3자 합의 시스템으로 의사를 결정하고 문제를 해결한다. 그는 ILO에서 장애인 인권향상과 관련된 부서에서 근무했다.

FF> 제네바에서 경험했던 ILO 인턴십에 대해 설명한다면?
국제기구 인턴십 프로그램에 관심을 갖고 인터넷을 통해서 정보를 수집하던 중, 한국에 있는 아시아인권센터(ACHR: Asia Center for Human Rights)에서 ILO 파견 인턴을 선발한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을 하게 되었다. ACHR은 몇 해 전부터 ILO와 함께 여러 사업을 진행해 오고 있었는데 인턴십도 그 중 하나였다.
국·영문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ACHR에 제출하여 서류전형에 합격하게 되어 영어로 진행되는 인터뷰에서 최종 2인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최종적으로는 제네바로부터 직접 걸려온 전화를 통해 간단한 관심사나 이력에 대한 구두면접을 유선상으로 진행한 후 제네바로 떠날 수 있었다.
6개월 계약으로 인턴을 하는 동안 다양한 프로젝트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그중 특히 16개의 유엔기구가 함께 진행했던 UN DDR(UN Disarmament, Demobilization and Reintegration)에 관련된 프로젝트가 기억에 남는다. 분쟁 후 지역의 평화건설에 관련된 매뉴얼을 만드는 데 ILO도 Crisis 부서와 함께 우리 장애인 팀이 참여했다. 그중 Crisis와 관련된 과거의 경험과 전공과의 연관성이 높아 그 부분에 대한 사전조사를 책임지고 진행할 수 있었고, 그래서 기구간 전문가 미팅에 대표로 참석하기도 하는 등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물론, 인턴이 어떤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는가는 어느 기구에서, 어느 부서에서, 어느 관리자와 함께 일하느냐 등 다양한 환경에 의해서 정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자신의 관심과 능력에 맞는 기구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며,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ILO는 전 세계에 수천 명의 직원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본부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은 세 명이 전부였다.
그리고 한국에서 온 인턴도 당시 나밖에 없었으니, 한국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낮은지는 말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이에 대해 단순히 분담금이 못 미치는 자국민의 진출 현실을 탓할 것이 아니라, 언어 및 전문성 그리고 적극성과 철저한 면에서 혹시 우리가 간과하는 부분이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턴이든 직원이든 채용과 관련해서는 매우 객관적이고, 실력 위주이기 때문에 지원자들의 실력을 높이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 하겠다.
 
 
FF>UN 인턴십을 위해 본인이 준비했던 과정이 궁금하다. 구상 과정이나 후배들을 위한 조언을 한다면?
개인적으로는 한 번의 시험으로 진출하는 것보단, 다양한 경험으로 ‘준비된’ 직원으로 채용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사실상 시험을 통한 진출인 경우 높은 언어구사력과 해당 분야에 대한 지식을 평가 받는 절차를 밟게 되는데, 이는 특정 기구에서 일하는 것과는 사실상 크게 관계가 없다. 그러나 본인이 관심을 가진 기구에서 인턴십 기회를 가진다면, 정말로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그 일에 대한 것에서부터 국제기구의 업무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미리 경험할 수 있다. 물론, 국제기구 인턴십 기회를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본인이 원하는 기구가 인턴을 선발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본인이 현장근무를 하고 싶다고 해도 현장에서는 인턴을 뽑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자신이 해당분야에 대한 전문성과 다양한 경험을 통해 실질적으로 일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인재가 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에서 살아와서 국제적인 환경에 노출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환경을 탓하지 마라. 국내에서도 다양한 자원봉사와 인턴십을 통해 자신의 전문성을 높일 수 있다.

FF> 구체적인 활동 경력이나 외국어 준비 등에 대해 조언한다면?
인턴십 프로그램을 통해 직접 겪어 본 결과 UN은 아마추어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JPO나 NCRE 혹은 YPP등의 제도를 시행하고 있으나, 실제 직원의 대부분은 해당 분야에서 오랜 경력과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국가기관, 사기업, 국제기구 등 다양한 분야의 경력들이야말로 국제기구에서 근무할 수 있는 기반을 확실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언어능력에 관해서는 근무지마다 조금의 차이는 있겠지만, 영어, 불어 혹은 스페인어 등의 언어로 많은 직원들이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더 놀라운 것은 40대든 50대든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수업을 듣는 직원들이 많다는 것이다. 언어는 결국 노력이고 습관이다. 그렇다면 ‘외국어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란 질문에 대한 답변은 쉽게 할 수 있다. 어떤 방법이든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하라는 것이다. 본인의 경우에도 처음에는 회화 책부터 시작해서 소설, 교양서적 등의 다양한 매체를 통해 영어를 지속적으로 준비해왔다. 다소 구식이지만 암기만큼 좋은 외국어 공부는 없는 것 같다.

FF> 독자들, 혹은 UN 인턴십을 준비하는 후배들을 위해 한마디 한다면?
유엔이나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일을 하는 곳이 유엔이나 국제기구가 되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관관계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낄 수 있을지 모르나, 실제로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유엔이나 국제기구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정작 그들 기구들의 존재 이유를 앞선다면, 진출도 물론 어렵겠지만 진출을 한다 하더라도 본인이 만들어 놓은 환상과 다른 실제에 실망할 수 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자신이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은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이 당신의 꿈을 발전시키는 첫 시작이 될 것이다.
덧붙이고 싶은 말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낙천적인 사고와 도전정신을 갖자는 것이다. 비단 나뿐만이 아닌 우리 세대의 모든 젊은이와 이 생각을 함께하고 싶다.
 
 
김광희가 공개하는 국제기구 인턴십 합격 Knowhow
ㆍ이력서는 항상 정기적으로 업데이트해 놓는 것이 좋다.
ㆍ영문 자기소개서는 지원하고자 하는 기구의 성격을 잘 반영해 세심하게 작성해야 한다.
국제기구 인턴십의 경우는 선발 자체가 무척이나 힘들기 때문에 그들이 선발하려고 하는 인턴의 자질에 내가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본인의 경우 인턴십과 관련해 내가 어떤 부서에서 무슨 일을 하게 될 것인가를 온라인 홈페이지와 ACHR에 직접 문의해 조금씩 감을 잡아갔고, 그에 맞춰서 자기 소개서를 작성했다. ILO 인턴십은 담당 슈퍼바이저가 장애인 관련 전문가였기 때문에, 장애인 관련 경험을 위주로 글을 써 나갔다. 학부 때, 학교의 지원으로 영국 런던으로 떠나 장애인의 교통이용과 관련한 조사를 했다. 한국과 영국을 비교해 정부에 리포트를 제출한 경험이 행운으로 작용했다
ㆍ서류 심사에 합격을 하고 난 후 면접의 준비는 더욱 전문성을 갖추는 것이 좋다. 서류 합격 후 나는 ILO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조사를 시작으로, 해당 부서와 관련한 프로젝트들에 대해 조사했다. 덕분에 당일 ACHR의 면접관 앞에서 크게 떨지 않고 자신 있게 면접을 치를 수 있었다.
 
ILO Fellowship Programme 지원과정 소개
ㆍ지원자격 : 대학원생, 대학원 졸업생 (전공불문) ① 대학원 이상의 학력을 소유한 자 ② 영어 능통 ③ IT, 자료조사, 영상 편집, 문서작성 능통자 우대 ④ 지원분야 관련 경력자 우대
ㆍ지원조건 : ① 파견 전 12월부터 아시아인권센터에서 국제회의, 워크숍의 준비, 진행 보조 가능자 ② 사후 활동 보고서 제출 및 보고회 참석 가능자
ㆍ파견지: ILO Headquarters in Geneva
ㆍ급여 : 월 1,500SF(Geneva) *ILO 인턴 선발 규칙에 의해 항공료, 숙식, 보험비 인턴 개인 부담.
ㆍ선발과정 ① 1차 서류심사 : 영문 이력서 (A4지 최대 2장 분량), 영문 자기소개서 (A4 1장) ② 2차 면접 : 1차 서류심사 통과자에 한하여 개별연락(PPT를 이용한 자기소개 영어 프리젠테이션 준비) more info>

www.achumanrights.org

글 / 유한석
사진 / 황제영, 나승(Nathing Studio)
 


[FF Magazine] Gates - 작은 마음에서 큰 꿈으로, 세계를 향해 도약하는 열정 / 김광희


TURNING POINT
학창시절, 무엇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있는 특별한 기억은 오직 음악이다. 음악을 통해 사람을 사귀었고, 음악을 하며 쓴맛도 봤지만 행복했다. 학원비를 받아다 몰래 음악에 투자하던 고교시절도,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베이스기타를 맡아 군 입대 전까지 배곯아가며 공연에 몰두하던 대학시절도 그에게는 소중한 추억이다. 그것이 가장 쉬운 일이며 가장 원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중간고사도 빼먹고 공연에 몰두하던 베이스기타리스트 김광희는 긴 머리를 자르고 입대하며 2000년 10월 동티모르로 파견되어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덥지만 비교적 견딜 만했던 날씨, 풍족했던 보급품 덕에 낯선 땅에서 하는 군 생활이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았다. 주말이면 부대원들과 인근의 바닷가로 놀러 가 수영도 하고 마을의 어린아이들에게 과자도 나눠주며 나름의 뿌듯한 시간을 보내던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한 8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일행의 가방을 훔쳐 달아난 것이다. 물론 마을 아이들에게 나눠주려 가져갔던 물건들이었지만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다음 주, 또 다시 수영을 하러 해변에 나가면서 더 많은 양의 음식을 챙겼다. 부족한 아이들에게 조금 더 나눠준다는 마음이었다. 그곳에는 가방을 가지고 갔던 여자아이도 있었다. 예의주시하면서도 모른 척하던 그는 같은 아이에게 또 한 번 가방을 털렸다. 아무리 어려워도 자신만을 위해 도둑질하는 아이가 못마땅했다. 그 일이 잊힐 때쯤 그의 부대는 인근지역을 수색하는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어느 외딴 마을에서 가방을 훔쳐간 아이와 마주쳤다. 아이는 그를 보고 눈물을 터뜨리며 집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의 거처로 그를 이끌었다. 아이의 오빠가 병상에 누워 죽어가고 있었고, 훔쳐갔던 음식들은 고스란히 병상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아이에게 품었던 나쁜 생각들이 그를 더욱 원망스럽게 했다. 그다음부터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보급품까지도 어린이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난 부대에서 나오는 식사로도 세끼를 해결하니까’라는 생각에 무조건 퍼주기 시작했다
 
CHECK POINT
전역 후에도 자신의 진로에 대한 명확한 목표는 없었다. 다만 국제기구에서 국제분쟁과 세계를 위해 일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앞섰다. 그러나 자료가 빈약했다. 당시엔 앞길을 터놓은 선배도, 정보를 공유하던 블로그 등도 미비한 것이 현실이었다. “요즘 UN의 인턴십이나 프로그램, 자원봉사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 비약적으로 눈에 보입니다. 제가 관련 카페에 처음 가입했던 2002년 당시 1,000여명 남짓이던 회원수가 현재는 45,000명을 넘었으니 말이죠.”
UN의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도 많이 봐왔으나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던 화려한 경력과 이력을 갖고 있었고, 정보를 공유해주지도 않았다. 무조건 발로 뛰었다. 그는 학부 시절부터 국내 기구의 봉사활동을 통해 UN 인턴십의 기반을 다졌다. ‘지구촌 나눔 운동 NGO'의 대학생 연합회로 들어가 처음 접했던 실무가 행사장 주차관리였다. 내심 사무국에서 유창한 영어, 혹은 불어나 서반아어로 실무진에게 업무를 배우며 큰 경험을 쌓는 동기들이 부러웠다. “처음엔 좌절감에 휩싸였죠. 열심히 준비했고 많이 노력해서 겨우 들어오게 됐는데 주차관리나 했으니까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영어도 부족하고 그만한 경력이나 이력도 갖추지 못했던 저였습니다. 무기라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배짱 하나였으니까요. 하지만 바닥에서부터 올라간다는 마음으로 차근차근 배워 사무국에서 실무진과 함께 일할 수 있었죠.”

그 역시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실패가 주는 좌절이나 후회를 느끼는 사람이다. 하지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때로는 실패를 더욱 성장하는 발판으로 다지는 용기라는 큰 무기를 가지고 있다. 누구나 그럴 수 있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왜 실패했나?’보다는 ‘어떻게 하면 다음에 성공할까?’라는 생각이 그를 지탱해주는 가장 큰 신념이라고 한다. 일전에 어느 고등학생에게서 이메일을 한 통 받은 적이 있다. 그 여학생은 자신이 꿈꾸는 미래에 가장 부합되는 인물이 광희라고 밝혔다. 자신도 누군가의 롤모델이라니…… 가당치 않다고, 아직은 부족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싶다는 학생들이나 후배들의 꿈에 대해 책임감을 느꼈고 더욱 정진하는 계기가 됐다.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사회적 책임이랄까? 어깨가 무거웠다. 그의 부모님도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아들이 평범한 직장에 들어가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길 원했지만 그러기엔 한길만 보고 뛰어온 지난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최근 국제정치과 석사논문이 통과되었고, 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4월에는 전액 장학혜택을 받으며 코스타리카에 있는 UN 산하 U PEACE 대학원에서 수학할 예정이다. 더욱 좋은 것은 19개월의 코스(국제분쟁 및 평화 전공) 중 11개월간의 정규과정을 마치면 나머지 기간 동안에는 UN의 각 사무국으로 파견되어 실무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인으로는 역대 세 번째 U PEACE 학생이 됨과 동시에 자신에게 있어서도 큰 기회를 갖게 되었다. 수 차례의 국제행사와 인턴십을 겪으며 그가 매번 느낀 것이 있다. 전 세계의 전문가들과 일을 하다 보니 열정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광희식 사고’를 더하니 전 세계의 뛰어난 인재들과 경쟁하고 그 벽을 넘어서고 싶은 도전정신이 싹트기 시작했다.

ILO(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 인턴십 등의 경험이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겐 더없이 소중한 경험과 재산이다. 바로 ‘실패’와 ‘좌절’을 통해 자신을 단련할 수 있었고 더 높은 곳을 향해 도약하는 에너지의 근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과정을 호되게 겪은 탓일까?
그는 현재 UN 인턴십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서로의 경험과 생각을 공유하는 인터넷 카페의 운영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정보의 공유를 아끼던 동기들과 달리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과 정보를 나누며 시너지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사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제공되는 정보는 상당히 미비하기 짝이 없다. 올해로 UN에 가입한지 20년이 되는 나라로 볼 때, 상당히 부끄러운 현실이다. 이에 반해 그들이 운영하는 카페에는 비교적 방대한 정보와 무엇보다 도움이 될 만한 선배들의 ‘경험’이 있다. 더욱 상세한 정보와 생생한 경험담은 http://cafe.daum.net/unitednations
에서 확인할 수 있다.

 
POINT OF VIEW
김광희는 대학 졸업 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 재학 시절인 2008년 9월부터 2009년 3월까지 UN의 특별기구인 ILO 인턴십에 채용되어 ILO 본부가 있는 제네바에서 근무했다. 쉽게 말해 ILO는 국제노동기구다. 1919년 설립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글로벌 기구로 UN이 창시되었던 1945년보다 훨씬 앞서 설립되었다. 노동이라는 행위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며, 모든 이에게 균등하게 노동을 제공해야 한다는 취지로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활약한다. UN이 설립될 당시 ILO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UN의 산하기구가 아닌 특별기구로 운영되고 있다. 노동문제가 발생한 지역에 파견되어 분쟁을 조정하는데, 대의제를 통해 각국의 대표가 의사결정을 하는 다른 국제기구와 달리 분쟁의 당사자인 사측과, 노동자 측, 정부의 3자 합의 시스템으로 의사를 결정하고 문제를 해결한다. 그는 ILO에서 장애인 인권향상과 관련된 부서에서 근무했다.

FF> 제네바에서 경험했던 ILO 인턴십에 대해 설명한다면?
국제기구 인턴십 프로그램에 관심을 갖고 인터넷을 통해서 정보를 수집하던 중, 한국에 있는 아시아인권센터(ACHR: Asia Center for Human Rights)에서 ILO 파견 인턴을 선발한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을 하게 되었다. ACHR은 몇 해 전부터 ILO와 함께 여러 사업을 진행해 오고 있었는데 인턴십도 그 중 하나였다.
국·영문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ACHR에 제출하여 서류전형에 합격하게 되어 영어로 진행되는 인터뷰에서 최종 2인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최종적으로는 제네바로부터 직접 걸려온 전화를 통해 간단한 관심사나 이력에 대한 구두면접을 유선상으로 진행한 후 제네바로 떠날 수 있었다.
6개월 계약으로 인턴을 하는 동안 다양한 프로젝트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그중 특히 16개의 유엔기구가 함께 진행했던 UN DDR(UN Disarmament, Demobilization and Reintegration)에 관련된 프로젝트가 기억에 남는다. 분쟁 후 지역의 평화건설에 관련된 매뉴얼을 만드는 데 ILO도 Crisis 부서와 함께 우리 장애인 팀이 참여했다. 그중 Crisis와 관련된 과거의 경험과 전공과의 연관성이 높아 그 부분에 대한 사전조사를 책임지고 진행할 수 있었고, 그래서 기구간 전문가 미팅에 대표로 참석하기도 하는 등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물론, 인턴이 어떤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는가는 어느 기구에서, 어느 부서에서, 어느 관리자와 함께 일하느냐 등 다양한 환경에 의해서 정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자신의 관심과 능력에 맞는 기구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며,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ILO는 전 세계에 수천 명의 직원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본부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은 세 명이 전부였다.
그리고 한국에서 온 인턴도 당시 나밖에 없었으니, 한국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낮은지는 말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이에 대해 단순히 분담금이 못 미치는 자국민의 진출 현실을 탓할 것이 아니라, 언어 및 전문성 그리고 적극성과 철저한 면에서 혹시 우리가 간과하는 부분이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턴이든 직원이든 채용과 관련해서는 매우 객관적이고, 실력 위주이기 때문에 지원자들의 실력을 높이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 하겠다.
 
 
FF>UN 인턴십을 위해 본인이 준비했던 과정이 궁금하다. 구상 과정이나 후배들을 위한 조언을 한다면?
개인적으로는 한 번의 시험으로 진출하는 것보단, 다양한 경험으로 ‘준비된’ 직원으로 채용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사실상 시험을 통한 진출인 경우 높은 언어구사력과 해당 분야에 대한 지식을 평가 받는 절차를 밟게 되는데, 이는 특정 기구에서 일하는 것과는 사실상 크게 관계가 없다. 그러나 본인이 관심을 가진 기구에서 인턴십 기회를 가진다면, 정말로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그 일에 대한 것에서부터 국제기구의 업무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미리 경험할 수 있다. 물론, 국제기구 인턴십 기회를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본인이 원하는 기구가 인턴을 선발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본인이 현장근무를 하고 싶다고 해도 현장에서는 인턴을 뽑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자신이 해당분야에 대한 전문성과 다양한 경험을 통해 실질적으로 일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인재가 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에서 살아와서 국제적인 환경에 노출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환경을 탓하지 마라. 국내에서도 다양한 자원봉사와 인턴십을 통해 자신의 전문성을 높일 수 있다.

FF> 구체적인 활동 경력이나 외국어 준비 등에 대해 조언한다면?
인턴십 프로그램을 통해 직접 겪어 본 결과 UN은 아마추어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JPO나 NCRE 혹은 YPP등의 제도를 시행하고 있으나, 실제 직원의 대부분은 해당 분야에서 오랜 경력과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국가기관, 사기업, 국제기구 등 다양한 분야의 경력들이야말로 국제기구에서 근무할 수 있는 기반을 확실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언어능력에 관해서는 근무지마다 조금의 차이는 있겠지만, 영어, 불어 혹은 스페인어 등의 언어로 많은 직원들이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더 놀라운 것은 40대든 50대든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수업을 듣는 직원들이 많다는 것이다. 언어는 결국 노력이고 습관이다. 그렇다면 ‘외국어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란 질문에 대한 답변은 쉽게 할 수 있다. 어떤 방법이든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하라는 것이다. 본인의 경우에도 처음에는 회화 책부터 시작해서 소설, 교양서적 등의 다양한 매체를 통해 영어를 지속적으로 준비해왔다. 다소 구식이지만 암기만큼 좋은 외국어 공부는 없는 것 같다.

FF> 독자들, 혹은 UN 인턴십을 준비하는 후배들을 위해 한마디 한다면?
유엔이나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일을 하는 곳이 유엔이나 국제기구가 되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관관계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낄 수 있을지 모르나, 실제로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유엔이나 국제기구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정작 그들 기구들의 존재 이유를 앞선다면, 진출도 물론 어렵겠지만 진출을 한다 하더라도 본인이 만들어 놓은 환상과 다른 실제에 실망할 수 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자신이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은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이 당신의 꿈을 발전시키는 첫 시작이 될 것이다.
덧붙이고 싶은 말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낙천적인 사고와 도전정신을 갖자는 것이다. 비단 나뿐만이 아닌 우리 세대의 모든 젊은이와 이 생각을 함께하고 싶다.
 
 
김광희가 공개하는 국제기구 인턴십 합격 Knowhow
ㆍ이력서는 항상 정기적으로 업데이트해 놓는 것이 좋다.
ㆍ영문 자기소개서는 지원하고자 하는 기구의 성격을 잘 반영해 세심하게 작성해야 한다.
국제기구 인턴십의 경우는 선발 자체가 무척이나 힘들기 때문에 그들이 선발하려고 하는 인턴의 자질에 내가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본인의 경우 인턴십과 관련해 내가 어떤 부서에서 무슨 일을 하게 될 것인가를 온라인 홈페이지와 ACHR에 직접 문의해 조금씩 감을 잡아갔고, 그에 맞춰서 자기 소개서를 작성했다. ILO 인턴십은 담당 슈퍼바이저가 장애인 관련 전문가였기 때문에, 장애인 관련 경험을 위주로 글을 써 나갔다. 학부 때, 학교의 지원으로 영국 런던으로 떠나 장애인의 교통이용과 관련한 조사를 했다. 한국과 영국을 비교해 정부에 리포트를 제출한 경험이 행운으로 작용했다
ㆍ서류 심사에 합격을 하고 난 후 면접의 준비는 더욱 전문성을 갖추는 것이 좋다. 서류 합격 후 나는 ILO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조사를 시작으로, 해당 부서와 관련한 프로젝트들에 대해 조사했다. 덕분에 당일 ACHR의 면접관 앞에서 크게 떨지 않고 자신 있게 면접을 치를 수 있었다.
 
ILO Fellowship Programme 지원과정 소개
ㆍ지원자격 : 대학원생, 대학원 졸업생 (전공불문) ① 대학원 이상의 학력을 소유한 자 ② 영어 능통 ③ IT, 자료조사, 영상 편집, 문서작성 능통자 우대 ④ 지원분야 관련 경력자 우대
ㆍ지원조건 : ① 파견 전 12월부터 아시아인권센터에서 국제회의, 워크숍의 준비, 진행 보조 가능자 ② 사후 활동 보고서 제출 및 보고회 참석 가능자
ㆍ파견지: ILO Headquarters in Geneva
ㆍ급여 : 월 1,500SF(Geneva) *ILO 인턴 선발 규칙에 의해 항공료, 숙식, 보험비 인턴 개인 부담.
ㆍ선발과정 ① 1차 서류심사 : 영문 이력서 (A4지 최대 2장 분량), 영문 자기소개서 (A4 1장) ② 2차 면접 : 1차 서류심사 통과자에 한하여 개별연락(PPT를 이용한 자기소개 영어 프리젠테이션 준비) more info>

www.achumanrights.org

글 / 유한석
사진 / 황제영, 나승(Nathing Studio)
 


이전글 [FF Magazine] View Point - 이제, 재미있어질 패션시대로의 카운트다운
다음글 [FF Magazine] Project - 미얀마 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