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FF Magazine] 학교도, 회사도 아닌 크리에이티비티의 산실, 파브리카

  • 10.10.04 / 이민아


파브리카는 전 세계의 젊은 예술가들을 후원하기 위하여 이탈리아의 의류회사인 베네통이 1994년에 설립한 커뮤니케이션 연구센터이다. 25세 이하의 젊은 창작자를 초청하여 영화, 사진, 디자인, 뮤직비디오, <컬러스> 잡지 출판, 인터랙티브 &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등의 작업을 통해 새로운 이슈와 시각 언어, 스타일을 생산한다. 파브리카는 라틴어로 ‘워크샵 (Workshop)’을 의미하며, 기술과 지식 위주 수업이 아닌 체험 실습과 토론을 주로 행함으로써 창의성을 계발하는 데 주력한다. 파브리카는 독특하고 실험적인 방법론으로 지역, 종교, 인종의 경계를 넘어서 전 지구적인 문화 교류를 시도한다. 이탈리아의 트레비소 외곽에 위치한 센터의 빌딩은 일본의 건축가 안도 다다오에 의해 재건축되었다. 최근 들어 파브리카는 보다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고 국제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인 최초로 파브리카 연구원이 된 안남영은 현재 4년째 이탈리아에서 작업 중이다. 이화여대에서 시각정보디자인과 미술사를 공부한 후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과 도전으로 파브리카에 지원했다. 함께 트라이얼 테스트를 받았던 한국인들 중에 유일하게 초청을 받아 이제는 ‘학생’에서 ‘연구원’으로 자리하고 있다. 안남영 연구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파브리카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이 이야기는 파브리카에 지원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가이드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구정연(이하 구) : 자신에 대해서 소개해 달라
안남영(이하 남) : 내 이름은 안남영이다. 요새는 그냥 Nam이라고 더 많이 불린다. 내 이름이 '안'이고 성이
‘남영’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도 많다. 나쁠 건 없고 재미있다. 네다섯 살, 유치원도 안 다니던 시절에 세 살 터울의 언니가 다니는 미술학원에 따라 갔다 온 날, 나도 미술학원에 보내달라고 밤새 울고 떼썼다. 다음 날 손잡이 달린 8절 스케치북과 18색 '티티 크레파스'를 얻어 당당히 다니게 된 동네 작은 미술학원이 내가 가고 있는 길의 시작이다. 나는 서울예고 졸업 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시각정보디자인과 미술사를 공부했다. 졸업 후 서울의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 당시엔 ‘디자인’ 그리고 ‘크리에이티비티’라는 단어의 정의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던 걸로 기억한다. 2007년 파브리카에 와서 벌써 4년째 생활하며 작업 중이다. 이탈리아의 강렬한 햇볕 덕분에 피부가 많이 탔고 한국 여자들이 그토록 무서워하는 기미도 많이 생겼다. 서울에서 2~3만원 주고 파스타 한 접시를 사먹는 것이 돈 아깝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고, 남들이 와인 공부할 시간에 나는 물보다 싼 그것을 즐길 기회가 많음을 감사하면서 지내고 있다.
나는 서류의 직업란을 채워야 할 때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단어를 쓰는 것을 가끔은 망설인다. 그리고 나 자신을 아티스트, 일러스트레이터, 타이포그라퍼라고 칭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정의하는 데에는 능숙하지 못하다. 그러나 디자인은 장식이 아니라는 것, 소통은 혼자 얘기하고 남들이 들어주길 강요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나는 눈을 즐겁게 하는 많은 것들을 사랑하지만 눈‘만’ 즐겁게 하는 것은 별로 안 좋아한다. 디자이너는 외계인도 특별한 무엇도 세계를 구하는 영웅도 아니지만 내 직업이 사람들의 삶을 조금 더 살 만한 것으로 만들고 재미있게 해줄 수 있기를 항상 꿈꾼다. 일단은 한 사람, 나 자신의 삶만큼은 더 살 만하고 재미있게 해주니 내가 그리 실패한 길을 가고 있지는 않은가 보다.
가방 끈이 별로 길지 못해 현학적으로 디자인 철학 따위를 말할 능력은 안 된다. 매번 다른 프로젝트 혹은 브리프를 만나 매번 다른 소통 방법을 찾아야 하기에 공통된 이론을 가지기도 힘들다. 그냥 기본을 잃지 말자고, 주객전도시키지 말자고 되새긴다. 결국 같은 얘기일지 모르는데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그래픽 디자인은 효과적인 소통이 기본이며 주라는 점, 소통을 효과적으로 하는 데 필요한 것과 버려야 하는 것을 끊임없이 생각하자는 것’ 정도가 내가 지키려고 하는 마음가짐이다.
구 : 현재 파브리카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어떤 계기로 참여하게 되었나?
남 : 서울이 디자인은 물론 문화나 기술면에서 다른 나라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교육을 받고 작업을 해왔다. 나는 내가 시작되고 내가 속한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 목적지가 확실하게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서 벗어나 완전한 이방인이 되는 기회, 혹은 너무 가까워서 보지 못하고 놓치고 있던 것들을 멀리서 바라볼 기회를 너무나도 간절히 찾고 있었다.
파브리카라는 기관에 대해서는 대학교 1학년 때인가 잡지를 통해 알고 있었다. 그때는 스물다섯 살이 너무 먼 미래로 느껴졌고 그냥 막연히 나중에 지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후 내가 비상구를 절실히 찾던 차에 ‘파브리카 10주년 기념 전시’가 서울에서 열렸고 운 좋게도 전시 기간에 워크샵과 포트폴리오데이가 함께 이뤄졌다. 큰 자신감이 있었다고는 말 못하겠다. 우선 도전했고 나 이외에도 네 명의 한국 학생들이 ‘트라이얼(1년간의 스칼라십을 받기 전에 2주간 파브리카에 초대되어 작업 진행 역량을 평가하는 인터뷰 혹은 테스트 개념의 선별 과정)’에 초대되었다. 네 명의 한국 학생들이 차례로 파브리카에 다녀왔고, 내가 아마 마지막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트라이얼 후 두어 달 뒤 1년 스칼라십 초대를 받았다.

구 : 파브리카에 대한 정의는 여전히 쉽지 않다.
파브리카의 내부에 속한 사람으로서 파브리카를 소개한다면?

남 : chaos? roller-coaster? melting pot? 매번 느끼지만 파브리카의 정의에 관한 질문에 짧게 대답하기는 정말 어려운 것 같다. ‘파브리카: 베네통 커뮤니케이션 리서치 센터’는 베네통에서 커뮤니케이션 아트와 디자인 리서치를 위해 설립한 센터로 전 세계의 만 25세 이하의 젊은 크리에이터들을 초대하여 후원한다. 파브리카는 강의의 듣고 과제를 진행하여 학위를 얻는 ‘학교’가 전혀 아니며 또한 클라이언트 업무만을 주로 하는 ‘디자인 에이전시’도 아니다. 베네통의 후원을 받기는 하나 베네통의 디자인실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간혹 베네통의 클라이언트가 되어 보다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경우는 있다. 또한 여타의 아티스트 레지던시처럼 자신만의 스튜디오에서 홀로 개인 작업만을 진행하는 곳도 아니다.
  구 : 여전히 정의하기가 쉽지가 않다.
남 : 파브리카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세 가지 단어를 열거하자면 ‘creativity’, ‘diversity’ 그리고
‘communication’이다. 파브리카는 아카데믹한 커리큘럼 하에 진행된다기보다 실제 작업과 리서치, 토론, 워크샵 등을 통해 자신들만의 크리에이티비티를 발전시켜 나아간다. 베네통의 브랜드 아이덴티티에 충실하게 실험적이고 인종, 종교, 문화적인 경계를 넘어선 젊고 창조적인 소통을 이루어내고자 언제나 노력한다. 분위기는 다이나믹 그 자체이다. 세계 각국의 젊고 열정적인 크리에이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고 생각해보자. 조용하고 순조로운 프로젝트 진행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그것을 서로 평가하고 조언하며 다시 거기에 반문을 제기하고 작업에 작업을 거듭하고 하루아침에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고 이런 다이나미즘이 파브리카의 하루하루이다.
파브리카는 내가 속한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분과를 비롯하여 프로덕트 디자인, 비디오/필름, 사진, 음악, 인터랙티브, 크리에이티브 글쓰기 분과로 구성되어 있다. 곧 한국어 버전이 발간될 <컬러스> 매거진도 파브리카에 자리하고 있다. 파브리카는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에 때에 따라 분과별 개별적 작업을 진행하기도 하고 혹은 전체가 참여하여 아이디어와 기술을 공유하는 협업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구 : 파브리카에서 학생이었을 때와 연구원이었을 때 어떻게 다른가. 파브리카에서의 현재 업무를 소개해 달라.
남 : 학교가 아닌 이곳에서 ‘학생’은 무슨 의미일까 의아할 것이다. 파브리카에 1년 스칼라십에 초대된 모든 파브리칸티(Fabricanti)의 신분은 ‘학생’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할이라기보다는 비자와 같은 형식적인 문제 때문에 칭하는 신분일 것이다. 현재 컨설턴트로 있으나 역할이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장님도, 인턴사원도 어차피 그래픽 디자이너니까. 책임감이 좀 더 많이 따르게 되는 정도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학생’들과 함께하는 작업과 내가 혼자 책임을 지고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병행한다.
구 : 파브리카에서 일하면서 느끼는 장단점은?
남 : 이곳은 분명히 유일무이한 특별한 경험을 준다. 이곳의 사람들은 철저하게 다른 환경에서 20년을 넘게 보냈다. 언어도 생김새도 문화적인 배경도 너무나 철저히 다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크리에이티비티와 열정이 아마 유일한 공통점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러한 이들이 이탈리아의 외딴곳, 주변과 철저히 다르게 생긴 건물(안도 다다오의 콘크리트 빌딩은 이탈리아의 주택과 당연히 구별된다)에 모여 직장 동료이자 친구이자 가족이 되어
1년이라는 시간을 보낸다. 다양한 크리에이터들과의 협업, 함께 나눈 순간순간들은 파브리카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싶다. 내가 떠나온, 내 자리가 분명한 그 사회에서는 결코 보고 들을 수 없는 값진 경험들, 그로 인한 서로의 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경이 아마도 베네통이 이 기관을 세우면서 꿈꾼 것들이 아니었을까? 이방인이지만 나만이 이방인이 아닌 모두가 이방인인 이 경험은 분명히 다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특별한 그 무엇이다.
가끔은 한 방향으로 쉽게 갈 수 있는 기회를 다양성 때문에 놓치기도 한다. 미로 같은 길을 헤맨 후에야 갈 길을 찾기가 일쑤다. 예를 열거하자면 3박4일은 걸릴 것 같아서 여기까지 얘기하겠다.

구 : 파브리카가 당신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남 : 내가 그리 어리진 않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얘기할 정도로 많은 경험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섣불리 얘기를 꺼내기가 조심스럽다. 그냥 파브리카에서 배운 점, 경험을 통해 바뀐 점 등을 열거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내가 참 모르는 게 많구나.
. 그런데 내가 아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구나.
. 소통이라는 게 쉬운 게 아니구나.
. 소통에는 참 다양한 방법들이 있구나.
. 시각적, 청각적 감각 등에도 그것들만의 언어가 존재하는구나.
디자인, 아트에 대해 참으로 다양한 정의가 이뤄지고 있구나.
.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기 자신을 참 사랑하는구나.
. 그리고 알게 모르게 자기 직업도, 작업도 참 사랑하는구나.
. 우리는 자신만의 상자 밖으로 벗어나기가 어렵구나.
. 그런데 그것조차 모르고 있구나.
사람마다 가진 인생의 우선순위가 정말 다양하구나.
. 많은 언어를 한꺼번에 완벽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구나.
. 영국 텔레비전 쇼, 특히 코미디는 정말 재미있구나.
. 이탈리아에서 더빙이 안 된 영화를 극장 가서 보기가 참 어렵구나.
. 한국어에 콩글리쉬가 참 많이 섞여 있구나.
.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훨씬 깔끔하구나.
. 국적과 상관없이 여자들은 참 유니버설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구나.
. 앞으로 해야 할 일들, 배워야 할 것들, 가봐야 할 곳들이 너무너무 많구나.
 
구 : 파브리카에 입학하고 싶은 학생들이 국내에도 많다.
이런 학생들에게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지, 어떤 자세가 필요한지 조언을 해달라.

남 : ‘입학’이라는 단어가 적합한지 모르겠다. 거듭 말하지만 파브리카는 학교가 아니다. 파브리카에 대해 가장 많이 혼동하는 부분이 이 부분인 것 같다. ‘입학’과 ‘입사’에 대한 마음가짐과 대처가 다르기에 이 부분을 짚을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입사 준비하라고 말하기도 조금은 조심스럽다. 그냥 이곳이 학교도 회사도 아닌 곳이라는 점을 말해주고 싶다. 그저 파브리카에 오고 싶었고 운 좋게 초대는 되었으나 자신의 자리를 잘 찾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경우들도 있다. 이곳 역시 사람 사는 곳이지 유토피아가 아니다. 가만히 앉아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크게 가져다주리라는 착각은 금물이다. 자신이 찾는 만큼 자신이 마음의 문을 여는 만큼 얻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감과 자만심의 차이를, 겸손과 수줍음의 차이를 알기를 바란다. ‘소통’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길. 다양한 국적의 친구, 동료, 클라이언트와의 소통은 같은 문화와 추억을 공유한 사람과의 소통과는 분명히 다를 테니.

구 : 파브리카의 입학 절차나 자격 조건에 대해서 말해달라
남 : 우선 나이가 만 25세 이하여야 한다. 나이 문제가 없다면 포트폴리오는 자신이 관심 있는 분과로 보낸다. 한국 학생들이 가장 많이 물어보는 질문이 ‘포트폴리오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요?’인데 형식은 없다. 자신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포트폴리오가 파브리카뿐 아니라 어디서나 가장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다. 자신의 역량과 열정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내용과 형식이면 된다. 책, 인형, 사진, 선물 상자, 비디오, 웹사이트 등 무엇으로든 상관없다. 포트폴리오로 자신을 어필하는 것이 성공하고 나면 각 분과의 학장으로부터 2주간의 트라이얼에 초대되게 된다. 2주 동안 이곳 파브리칸티들과 함께 생활하고 작업을 하게 되는데 이때 이루어지는 과제 역시 항상 다르다. 여기서 진행하고 있는 작업을 함께 진행하거나 개별적인 과제를 수행하곤 한다.
영어 문제에 관한 질문이 많은데 언어의 경우 어학시험 점수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엉터리 영어건 완벽한 영어건 간에 이곳에서 다른 국적의 크리에이터들과 협업이 가능하고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언어의 문제보다 문화나 성격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2주간의 트라이얼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1년간의 스칼라십을 받게 된다. 이때 1년 프로그램에 초대될 경우 신분은 ‘학생(student)’이다. 형식적인 절차를 쉽게 하기 위함일 뿐 수업 듣고 숙제하고 점수 기다리는 학생은 아니다.
거듭 얘기하지만 파브리카는 학교가 아니다. 모집 공고, 모집 기간, 모집 절차 그 모든 것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또한 일정한 인원이 시작과 끝을 같은 시기에 하지도 않고 오리엔테이션이나 소개 절차도 전혀 없다. 이 부분에서 인내심이 많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 파브리카 웹사이트 : www.fabrica.it
* 파브리카 온라인 지원 : http://www.fabrica.it/apply
 
글 / 구정연(미디어버스 에디터_www.mediabus.org)


[FF Magazine] 학교도, 회사도 아닌 크리에이티비티의 산실, 파브리카


파브리카는 전 세계의 젊은 예술가들을 후원하기 위하여 이탈리아의 의류회사인 베네통이 1994년에 설립한 커뮤니케이션 연구센터이다. 25세 이하의 젊은 창작자를 초청하여 영화, 사진, 디자인, 뮤직비디오, <컬러스> 잡지 출판, 인터랙티브 &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등의 작업을 통해 새로운 이슈와 시각 언어, 스타일을 생산한다. 파브리카는 라틴어로 ‘워크샵 (Workshop)’을 의미하며, 기술과 지식 위주 수업이 아닌 체험 실습과 토론을 주로 행함으로써 창의성을 계발하는 데 주력한다. 파브리카는 독특하고 실험적인 방법론으로 지역, 종교, 인종의 경계를 넘어서 전 지구적인 문화 교류를 시도한다. 이탈리아의 트레비소 외곽에 위치한 센터의 빌딩은 일본의 건축가 안도 다다오에 의해 재건축되었다. 최근 들어 파브리카는 보다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고 국제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인 최초로 파브리카 연구원이 된 안남영은 현재 4년째 이탈리아에서 작업 중이다. 이화여대에서 시각정보디자인과 미술사를 공부한 후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과 도전으로 파브리카에 지원했다. 함께 트라이얼 테스트를 받았던 한국인들 중에 유일하게 초청을 받아 이제는 ‘학생’에서 ‘연구원’으로 자리하고 있다. 안남영 연구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파브리카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이 이야기는 파브리카에 지원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가이드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구정연(이하 구) : 자신에 대해서 소개해 달라
안남영(이하 남) : 내 이름은 안남영이다. 요새는 그냥 Nam이라고 더 많이 불린다. 내 이름이 '안'이고 성이
‘남영’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도 많다. 나쁠 건 없고 재미있다. 네다섯 살, 유치원도 안 다니던 시절에 세 살 터울의 언니가 다니는 미술학원에 따라 갔다 온 날, 나도 미술학원에 보내달라고 밤새 울고 떼썼다. 다음 날 손잡이 달린 8절 스케치북과 18색 '티티 크레파스'를 얻어 당당히 다니게 된 동네 작은 미술학원이 내가 가고 있는 길의 시작이다. 나는 서울예고 졸업 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시각정보디자인과 미술사를 공부했다. 졸업 후 서울의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 당시엔 ‘디자인’ 그리고 ‘크리에이티비티’라는 단어의 정의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던 걸로 기억한다. 2007년 파브리카에 와서 벌써 4년째 생활하며 작업 중이다. 이탈리아의 강렬한 햇볕 덕분에 피부가 많이 탔고 한국 여자들이 그토록 무서워하는 기미도 많이 생겼다. 서울에서 2~3만원 주고 파스타 한 접시를 사먹는 것이 돈 아깝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고, 남들이 와인 공부할 시간에 나는 물보다 싼 그것을 즐길 기회가 많음을 감사하면서 지내고 있다.
나는 서류의 직업란을 채워야 할 때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단어를 쓰는 것을 가끔은 망설인다. 그리고 나 자신을 아티스트, 일러스트레이터, 타이포그라퍼라고 칭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정의하는 데에는 능숙하지 못하다. 그러나 디자인은 장식이 아니라는 것, 소통은 혼자 얘기하고 남들이 들어주길 강요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나는 눈을 즐겁게 하는 많은 것들을 사랑하지만 눈‘만’ 즐겁게 하는 것은 별로 안 좋아한다. 디자이너는 외계인도 특별한 무엇도 세계를 구하는 영웅도 아니지만 내 직업이 사람들의 삶을 조금 더 살 만한 것으로 만들고 재미있게 해줄 수 있기를 항상 꿈꾼다. 일단은 한 사람, 나 자신의 삶만큼은 더 살 만하고 재미있게 해주니 내가 그리 실패한 길을 가고 있지는 않은가 보다.
가방 끈이 별로 길지 못해 현학적으로 디자인 철학 따위를 말할 능력은 안 된다. 매번 다른 프로젝트 혹은 브리프를 만나 매번 다른 소통 방법을 찾아야 하기에 공통된 이론을 가지기도 힘들다. 그냥 기본을 잃지 말자고, 주객전도시키지 말자고 되새긴다. 결국 같은 얘기일지 모르는데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그래픽 디자인은 효과적인 소통이 기본이며 주라는 점, 소통을 효과적으로 하는 데 필요한 것과 버려야 하는 것을 끊임없이 생각하자는 것’ 정도가 내가 지키려고 하는 마음가짐이다.
구 : 현재 파브리카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어떤 계기로 참여하게 되었나?
남 : 서울이 디자인은 물론 문화나 기술면에서 다른 나라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교육을 받고 작업을 해왔다. 나는 내가 시작되고 내가 속한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 목적지가 확실하게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서 벗어나 완전한 이방인이 되는 기회, 혹은 너무 가까워서 보지 못하고 놓치고 있던 것들을 멀리서 바라볼 기회를 너무나도 간절히 찾고 있었다.
파브리카라는 기관에 대해서는 대학교 1학년 때인가 잡지를 통해 알고 있었다. 그때는 스물다섯 살이 너무 먼 미래로 느껴졌고 그냥 막연히 나중에 지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후 내가 비상구를 절실히 찾던 차에 ‘파브리카 10주년 기념 전시’가 서울에서 열렸고 운 좋게도 전시 기간에 워크샵과 포트폴리오데이가 함께 이뤄졌다. 큰 자신감이 있었다고는 말 못하겠다. 우선 도전했고 나 이외에도 네 명의 한국 학생들이 ‘트라이얼(1년간의 스칼라십을 받기 전에 2주간 파브리카에 초대되어 작업 진행 역량을 평가하는 인터뷰 혹은 테스트 개념의 선별 과정)’에 초대되었다. 네 명의 한국 학생들이 차례로 파브리카에 다녀왔고, 내가 아마 마지막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트라이얼 후 두어 달 뒤 1년 스칼라십 초대를 받았다.

구 : 파브리카에 대한 정의는 여전히 쉽지 않다.
파브리카의 내부에 속한 사람으로서 파브리카를 소개한다면?

남 : chaos? roller-coaster? melting pot? 매번 느끼지만 파브리카의 정의에 관한 질문에 짧게 대답하기는 정말 어려운 것 같다. ‘파브리카: 베네통 커뮤니케이션 리서치 센터’는 베네통에서 커뮤니케이션 아트와 디자인 리서치를 위해 설립한 센터로 전 세계의 만 25세 이하의 젊은 크리에이터들을 초대하여 후원한다. 파브리카는 강의의 듣고 과제를 진행하여 학위를 얻는 ‘학교’가 전혀 아니며 또한 클라이언트 업무만을 주로 하는 ‘디자인 에이전시’도 아니다. 베네통의 후원을 받기는 하나 베네통의 디자인실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간혹 베네통의 클라이언트가 되어 보다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경우는 있다. 또한 여타의 아티스트 레지던시처럼 자신만의 스튜디오에서 홀로 개인 작업만을 진행하는 곳도 아니다.
  구 : 여전히 정의하기가 쉽지가 않다.
남 : 파브리카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세 가지 단어를 열거하자면 ‘creativity’, ‘diversity’ 그리고
‘communication’이다. 파브리카는 아카데믹한 커리큘럼 하에 진행된다기보다 실제 작업과 리서치, 토론, 워크샵 등을 통해 자신들만의 크리에이티비티를 발전시켜 나아간다. 베네통의 브랜드 아이덴티티에 충실하게 실험적이고 인종, 종교, 문화적인 경계를 넘어선 젊고 창조적인 소통을 이루어내고자 언제나 노력한다. 분위기는 다이나믹 그 자체이다. 세계 각국의 젊고 열정적인 크리에이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고 생각해보자. 조용하고 순조로운 프로젝트 진행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그것을 서로 평가하고 조언하며 다시 거기에 반문을 제기하고 작업에 작업을 거듭하고 하루아침에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고 이런 다이나미즘이 파브리카의 하루하루이다.
파브리카는 내가 속한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분과를 비롯하여 프로덕트 디자인, 비디오/필름, 사진, 음악, 인터랙티브, 크리에이티브 글쓰기 분과로 구성되어 있다. 곧 한국어 버전이 발간될 <컬러스> 매거진도 파브리카에 자리하고 있다. 파브리카는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에 때에 따라 분과별 개별적 작업을 진행하기도 하고 혹은 전체가 참여하여 아이디어와 기술을 공유하는 협업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구 : 파브리카에서 학생이었을 때와 연구원이었을 때 어떻게 다른가. 파브리카에서의 현재 업무를 소개해 달라.
남 : 학교가 아닌 이곳에서 ‘학생’은 무슨 의미일까 의아할 것이다. 파브리카에 1년 스칼라십에 초대된 모든 파브리칸티(Fabricanti)의 신분은 ‘학생’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할이라기보다는 비자와 같은 형식적인 문제 때문에 칭하는 신분일 것이다. 현재 컨설턴트로 있으나 역할이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장님도, 인턴사원도 어차피 그래픽 디자이너니까. 책임감이 좀 더 많이 따르게 되는 정도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학생’들과 함께하는 작업과 내가 혼자 책임을 지고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병행한다.
구 : 파브리카에서 일하면서 느끼는 장단점은?
남 : 이곳은 분명히 유일무이한 특별한 경험을 준다. 이곳의 사람들은 철저하게 다른 환경에서 20년을 넘게 보냈다. 언어도 생김새도 문화적인 배경도 너무나 철저히 다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크리에이티비티와 열정이 아마 유일한 공통점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러한 이들이 이탈리아의 외딴곳, 주변과 철저히 다르게 생긴 건물(안도 다다오의 콘크리트 빌딩은 이탈리아의 주택과 당연히 구별된다)에 모여 직장 동료이자 친구이자 가족이 되어
1년이라는 시간을 보낸다. 다양한 크리에이터들과의 협업, 함께 나눈 순간순간들은 파브리카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싶다. 내가 떠나온, 내 자리가 분명한 그 사회에서는 결코 보고 들을 수 없는 값진 경험들, 그로 인한 서로의 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경이 아마도 베네통이 이 기관을 세우면서 꿈꾼 것들이 아니었을까? 이방인이지만 나만이 이방인이 아닌 모두가 이방인인 이 경험은 분명히 다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특별한 그 무엇이다.
가끔은 한 방향으로 쉽게 갈 수 있는 기회를 다양성 때문에 놓치기도 한다. 미로 같은 길을 헤맨 후에야 갈 길을 찾기가 일쑤다. 예를 열거하자면 3박4일은 걸릴 것 같아서 여기까지 얘기하겠다.

구 : 파브리카가 당신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남 : 내가 그리 어리진 않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얘기할 정도로 많은 경험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섣불리 얘기를 꺼내기가 조심스럽다. 그냥 파브리카에서 배운 점, 경험을 통해 바뀐 점 등을 열거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내가 참 모르는 게 많구나.
. 그런데 내가 아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구나.
. 소통이라는 게 쉬운 게 아니구나.
. 소통에는 참 다양한 방법들이 있구나.
. 시각적, 청각적 감각 등에도 그것들만의 언어가 존재하는구나.
디자인, 아트에 대해 참으로 다양한 정의가 이뤄지고 있구나.
.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기 자신을 참 사랑하는구나.
. 그리고 알게 모르게 자기 직업도, 작업도 참 사랑하는구나.
. 우리는 자신만의 상자 밖으로 벗어나기가 어렵구나.
. 그런데 그것조차 모르고 있구나.
사람마다 가진 인생의 우선순위가 정말 다양하구나.
. 많은 언어를 한꺼번에 완벽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구나.
. 영국 텔레비전 쇼, 특히 코미디는 정말 재미있구나.
. 이탈리아에서 더빙이 안 된 영화를 극장 가서 보기가 참 어렵구나.
. 한국어에 콩글리쉬가 참 많이 섞여 있구나.
.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훨씬 깔끔하구나.
. 국적과 상관없이 여자들은 참 유니버설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구나.
. 앞으로 해야 할 일들, 배워야 할 것들, 가봐야 할 곳들이 너무너무 많구나.
 
구 : 파브리카에 입학하고 싶은 학생들이 국내에도 많다.
이런 학생들에게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지, 어떤 자세가 필요한지 조언을 해달라.

남 : ‘입학’이라는 단어가 적합한지 모르겠다. 거듭 말하지만 파브리카는 학교가 아니다. 파브리카에 대해 가장 많이 혼동하는 부분이 이 부분인 것 같다. ‘입학’과 ‘입사’에 대한 마음가짐과 대처가 다르기에 이 부분을 짚을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입사 준비하라고 말하기도 조금은 조심스럽다. 그냥 이곳이 학교도 회사도 아닌 곳이라는 점을 말해주고 싶다. 그저 파브리카에 오고 싶었고 운 좋게 초대는 되었으나 자신의 자리를 잘 찾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경우들도 있다. 이곳 역시 사람 사는 곳이지 유토피아가 아니다. 가만히 앉아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크게 가져다주리라는 착각은 금물이다. 자신이 찾는 만큼 자신이 마음의 문을 여는 만큼 얻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감과 자만심의 차이를, 겸손과 수줍음의 차이를 알기를 바란다. ‘소통’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길. 다양한 국적의 친구, 동료, 클라이언트와의 소통은 같은 문화와 추억을 공유한 사람과의 소통과는 분명히 다를 테니.

구 : 파브리카의 입학 절차나 자격 조건에 대해서 말해달라
남 : 우선 나이가 만 25세 이하여야 한다. 나이 문제가 없다면 포트폴리오는 자신이 관심 있는 분과로 보낸다. 한국 학생들이 가장 많이 물어보는 질문이 ‘포트폴리오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요?’인데 형식은 없다. 자신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포트폴리오가 파브리카뿐 아니라 어디서나 가장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다. 자신의 역량과 열정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내용과 형식이면 된다. 책, 인형, 사진, 선물 상자, 비디오, 웹사이트 등 무엇으로든 상관없다. 포트폴리오로 자신을 어필하는 것이 성공하고 나면 각 분과의 학장으로부터 2주간의 트라이얼에 초대되게 된다. 2주 동안 이곳 파브리칸티들과 함께 생활하고 작업을 하게 되는데 이때 이루어지는 과제 역시 항상 다르다. 여기서 진행하고 있는 작업을 함께 진행하거나 개별적인 과제를 수행하곤 한다.
영어 문제에 관한 질문이 많은데 언어의 경우 어학시험 점수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엉터리 영어건 완벽한 영어건 간에 이곳에서 다른 국적의 크리에이터들과 협업이 가능하고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언어의 문제보다 문화나 성격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2주간의 트라이얼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1년간의 스칼라십을 받게 된다. 이때 1년 프로그램에 초대될 경우 신분은 ‘학생(student)’이다. 형식적인 절차를 쉽게 하기 위함일 뿐 수업 듣고 숙제하고 점수 기다리는 학생은 아니다.
거듭 얘기하지만 파브리카는 학교가 아니다. 모집 공고, 모집 기간, 모집 절차 그 모든 것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또한 일정한 인원이 시작과 끝을 같은 시기에 하지도 않고 오리엔테이션이나 소개 절차도 전혀 없다. 이 부분에서 인내심이 많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 파브리카 웹사이트 : www.fabrica.it
* 파브리카 온라인 지원 : http://www.fabrica.it/apply
 
글 / 구정연(미디어버스 에디터_www.mediabu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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