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FF Magazine] Forever - 김용환 _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

  • 10.03.24 / 조영문
 


 
요즘 세대들에게 김용환이라는 이름은 퍽이나 낯설 것이다. 코주부라는 말도 한번쯤 들어봄직은 할지언정 그 실체를 알고 있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코주부 김용환은 그렇게 잊혀진 존재다. 김용환이 국내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가 해방공간과 1950년대이니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에 관한 소개는 옛날 잘 나가던 만화가이자 출중한 실력을 겸비한 삽화가 정도로 소개하는 글이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정도다. 만화 마니아이자 한때 잠시나마 만화출판도 하면서 만화와의 인연을 나름 맺고 있는 필자의 경우도 그를 알게 된 것이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으니, 그가 우리들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코주부 김용환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사람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그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박재동, 허영만 등 오늘날의 만화 대가들이 <코주부 삼국지>와 같은 만화적 토양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만화가에 대한 꿈을 키웠다는 고백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하지만 이것도 그에 대한 설명으로는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의 만화와 그림은 단지 지나간 시기의 박제된 유물이 결코 아니다. 그가 일궈낸 이미지의 세계는 오늘날의 우리들과도 씨줄날줄로 엮여 있다.
 
 
만화에 관한 김용환의 에피소드 중에는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다. 중학교 입학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 일면을 보게 해준다. 열다섯에 부산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한 김용환은 다음 해인 1926년에 또 응시하게 된다. 공부에 소질이 없었던 그는 시험지를 백지로 내는 대신에, 당시 신문에서 연재되던
<멍텅구리 헛물켜기>의 한 장면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합격을 기대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미술선생님이 김용환의 특별한 재능을 간파하여 도와준 덕택에 그는 간신히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네 칸 만화인 <멍텅구리 헛물켜기>가 1924년 말에 선보이기 시작했으니, 소년 김용환은 우리 만화 태동기의 열렬한 독자였던 것이다. 이 에피소드의 경우도 그렇지만 김용환을 둘러싼 에피소드들은 만화와 그림에 대한 그의 출중한 능력과 순진무구한 열정을 느끼게 한다.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1931년 일본으로 간 김용환은 간판집에서 일하는 한편 거리의 초상화가로 일하면서 생활을 꾸려나갔다. 그리고 미술학교 재학 중 일본인 급우의 소개로 일본의 이름난 삽화가의 조수로 일하는 중에 한 소년잡지에 응모한 펜화가 채택된다. 이후 김용환은 ‘기타코지’라는 필명으로 펜화가로서 전설적인 명성을 떨치기도 한다. 해방이 되기 직전인 1945년 5월에 김용환은 일본의 유명 출판사인 고단샤의 직원 신분으로 귀국한다. 서울에서 일본의 징병제도를 홍보하는 시국잡지의 편집 일을 맡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곧 그는 이어 해방을 맞는다.
 
 
해방 이전의 김용환의 활약이 일본에서 펜화를 중심으로 한 삽화가 주된 것이었다면, 해방 이후로는 삽화가보다는 만화가로서의 면모를 더욱 두드러지게 펼쳐 보인다. 해방 이전에 일본에서 명망 있는 펜화가로 활동할 때에도 국내 잡지에 만화를 소개하긴 했지만, 우리 만화사에 획을 그을 만한 성과들을 연달아내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에 들어서다.

무엇보다도 해방공간에서 그가 쏟아낸 시사만화는 이전 김용환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만은 아니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시사만화의 창안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해방공간에서 시사만화로 특출난 성과를 쏟아낸다. 우리 만화사의 시작으로는 1909년 <대한민보>에 1년 가까이 연재한 이도영의 한 컷짜리 만화를 든다. 사태를 정확하게 요약하여 독자들에게 설득력 있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만화라는 매체의 가능성이 근대기 벽두에 기적처럼 발현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도영의 놀라운 성과는 폭압적인 검열과 통제로 인해 식민 지배 하에서 더 이상 계승되지 못하고 말았다. 이도영이 개시한 만화는 우리 만화사의 시작임과 동시에 시사만화의 시작이기도 했다. 특히 시사만화는 식민 공간 어디에서도 발붙이지 못하고 해방을 맞았는데, 김용환이 정확하게 그 단절의 역사를 이어주었던 것이다.

김용환의 작품은 시사만화가 갖추어야 할 요건을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었다. 정세에 대한 정확한 판단, 정치적 입장,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명료함, 현대적인 그림체 등 모든 면에서 현대적인 시사만화의 전형이라 할만 했다. 1947년에 발표한 <삼팔선 블루스>를 예로 보자. 해방이 되었으되 소련과 미국의 새로운 식민 지배를 받다시피 한 당시의 형국을 날카롭게 뚫어보고 있다. 한 여인을 두고 상반신은 소련군과 함께, 하반신은 미국군과 함께 춤을 추고 있는 이 장면은 분단 한국의 운명을 정확하게 감지하고 있는 듯하다.
김용환이 쏟아내는 시사만화의 수준을 보노라면 식민지의 굴레에서 갓 벗어난 당시 시민사회의 활기와 역량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김용환 이후의 시사만화는 오랫동안 정치적 상황에 대해 우회적인 방식으로만 언급할 수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의 시사만화는 이승만정권의 탄압으로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1948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만화잡지를 발간하지만 정부의 폐간 조치로 2호에 그치고 만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주간으로 발행되는 만화신문을 창간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듬 해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이마저도 중단되고 만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그의 만화 인생 또한 극적으로 바뀌어야만 했다. 이승만의 한강다리 폭파로 미처 피난하지 못한 김용환은 결국 인민군에 체포되고 만다. 남한에서 유명인사로 펼친 활약을 빌미로 그는 반동분자로 낙인찍힌다. 다행히 인민군 역시 만화의 정치적 활용 가능성을 인식하고 김용환의 능력을 선전도구로 활용하게 되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다. 인민군 미술대에서 부역 활동을 하게 된 김용환은 이승만이 김일성의 구둣발에 채여 부산 앞바다에 코를 빠트리고 있는 대민 선전용 포스터를 그렸다고 한다. 몇 달 후에 상황은 또 다시 바뀌었다. 9월 28일에 서울이 수복되자 이번에는 인민군 부역 혐의로 수감된다. 다행히 만화가 김용환의 능력을 알아본 한 장교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하는 대신, 이번에는 김일성이 국군에 쫓겨 두만강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죽는 대민 선전용 포스터를 그리게 된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환경은 만화를 정치적 무기로 변화시켰다. 상대 진영의 취약한 고리를 파고들어 피아의 전투력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이데올로기 선전활동이 만화를 매개로 치열하게 펼쳐졌던 것이다. 이 당시에 생산된 이미지들 가운데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삐라’다. 당시에 유통되던 ‘삐라’의 표현 방식은 거의 만화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세를 단 몇 줄로 압축하든 과장을 하든 정서적 반응을 강력하게 환기시키든, 만화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 / 읽을 수 없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가장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최적의 매체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당시에 만화를 두고 펼쳐지는 이데올로기적 싸움은 또 다른 차원의 강력한 전쟁이었으며, 김용환 역시 자의든 타의든 이 소용돌이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52년 말에 김용환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싸움과는 대척점에 있는 듯이 보이는 어린이만화를 한국에서 처음으로 선보인다. 이데올로기적 선전의 일환으로 복무할 수밖에 없었던 만화로부터 탈피해 새로운 돌파구로 착안한 것이었을 성싶다.

 
 
 

코주부라는 캐릭터는 김용환을 대변하기도 한다. 유머러스하고 소탈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친근한 이미지의 캐릭터가 다름 아닌 김용환이었다는 진술은 당시 그를 아는 지인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코주부를 닮은 캐릭터들이 펼쳐내는 김용환의 만화 세계는 그의 성격에도 가장 부합하는 듯이 보인다. 특히 어린이만화에서 코주부의 캐릭터는 가장 성공적으로 구현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단행본 만화인 <홍길동의 모험>을 비롯해서 잡지 <학원>에 연재될 때부터 폭발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코주부 삼국지>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는 코주부 캐릭터를 내세워 어린이만화라는 새로운 영역과 시장을 성공적으로 개척해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성공하는 듯했다.
하지만 어린이만화의 성공은 예기치 않은 부작용을 낳았다. 어린이만화책이 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어린이만화책을 쏟아내는 바람에 시장은 혼탁해지고 질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는 독점적인 유통업체가 뛰어들어 만화가 더 이상 서점이 아닌, 만화방이라는 기형적인 유통체계를 통해 유통되는 현상이었다. 만화가에게나 만화출판가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만화방 유통체계는 이후 한국만화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게 된다.
또한 일본이나 유럽에서 만화가 성인들의 독서의 일환으로 정착되는 것과 달리, 만화를 어린애들의 오락쯤으로 여기는 편견도 이때부터 생긴다. 질 낮은 어린이만화의 범람과 만화방 유통체계는 만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부정적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만다. 만화를 둘러싼 혼탁한 상황에 직면하여 김용환은 해방공간과 1950년대에 걸쳐 열정적으로 펼친 만화인생을 정리하고 다시 일본으로 향한다.

 
 
 
김용환은 1959년에 한국을 떠나 도쿄에 있는 미군 극동사령부의 작전국 심리전과에서 1972년까지 근무하게 된다. 미군 극동사령부는 1955년부터 <자유의 벗>이라는 잡지를 매달 발간하여 전국의 관공서와 학교는 물론 농촌의 마을 단위에 이르기까지 배포된 일종의 미군 홍보지였다. 김용환은 이 잡지에서 표지 그림을 맡았다. <자유의 벗>의 표지는 상당 부분 한국적 소재를 다룬 이미지로 채워져 있었다. 한국의 풍속, 역사, 전통을 친근하게 되살리는 듯한 이들 이미지는 앞뒤 표지에 컬러로 인쇄되어 그림의 맛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게 했다. 당시 물자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을 감안하면 양질의 종이로 만들어진 <자유의 벗>의 컬러 표지는 주목을 받기에 충분할 터. 거기에 김용환의 세밀한 풍속화가 곁들여졌으니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것은 당연했다.
사실 <자유의 벗>이 미군의 홍보지였던 만큼 사람들의 특별한 관심을 끌만한 매체는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인을 대상으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고 미군의 존재를 홍보하기 위한 목적은 김용환의 탁월한 삽화 덕택에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자유의 벗>이 표지 그림으로 인해 얼마나 큰 반향을 이끌어냈는지는 이미 4,50여 년이 지난 세대들의 기억에서 쉽게 확인된다. 필자 역시 <자유의 벗>에 대한 기억은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각인되어 있다. <자유의 벗> 표지는 단연 돋보이는 눈요깃거리였다. 특히 농촌의 경우에는 교과서를 제외하곤 인쇄출판물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 시기를 보낸 많은 이들에게 <자유의 벗>은 강력한 시각적 주목을 이끌어냈던 문화적 경험이자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의 한 층위를 차지하고 있는 역사적 기록물이었다. 그만큼 <자유의 벗>은 당대의 특별한 경험의 일부로 받아들여졌다.
김용환의 삽화는 ‘한국적인’ 것이 어떤 것인지를 시각적으로 명료하게 입증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그림이 다루고 있는 내용들이 익숙한 한국의 풍속이나 역사적 내용을 많이 다루고 있는 데서 비롯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익숙한 것들은 자칫 상투적인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김용환의 그림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특히 세밀한 터치가 돋보여 마치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한 운동회의 장면이나 서울 구경하는 장면은 특정한 한 순간을 포착하여 화면으로 끌어온 듯한 생생함이 느껴진다.
김용환의 풍속화에는 코주부다운 특별함이 더해져 있다. 따뜻함이다. 필시 그가 생각하는 ‘한국적인 것’은 그의 성품만큼이나 따뜻한 것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는 따스함을 연상시킨다. 아마도 나라 밖으로 떠나 있었던 데서 생긴 고국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나이가 들면서 더욱 진하게 배인 것 같다. 또한 그의 풍속화에는 공동체의 연대감이 살아 있다. 한국적 풍속을 다룬 그의 많은 그림들이 사람들과의 어울림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식민지의 암울한 역사와는 아랑곳없는 여유와 따뜻한 유머, 낙천적인 분위기가 한국민의 공동체적 연대감을 더욱 고취시키고 있다.
우리는 김용환이 그린 풍속화에서 당대의 열망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삶과 역사에 대한 긍정, 온전히 변함없는 모습으로 전승되어야 할 것에 대한 희구, 타자(미국이든 일본이든)의 시선에 당당할 수 있는 자신감 같은 것들이 그런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한국적’ 이미지는 <자유의 벗>에 실려 그 시대를 대변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그는 그 시대의 ‘한국적’ 이미지의 창안자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김용환은 평생에 걸쳐 이순신과 그의 전적을 다룬 그림들을 그렸다. 심지어 일본의 한 군사잡지에서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 등에 대한 글을 3년여에 걸쳐 연재를 할 만큼 이순신에 대한 연구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충무공 이순신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식민 지배에 대한 경험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주간 만화잡지였던 <만화뉴스>의 기사로 해군을 취재하던 차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를 탐사하면서 본격적인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이순신 장군에 관한 그의 이미지 작업은 만화로, 역사화(달력, 잡지, 단행본)로, 펜화로, 슬라이드로 구현된다. 가히 전방위적인 영역에 걸친 작업이다. 특히 우리가 알고 있는 거북선에 대한 이미지는 전적으로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노량해전이나 명량해전과 같은 충무공의 활약상에 대한 시각적 이미지 작업 역시 거의 그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더욱이 한국인이라면 성장 과정에서 숱하게 접했을 이순신에 관한 이미지의 생산자가 바로 코주부 김용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순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그리고 이순신 장군에 대한 시각적 경험의 상당 부분을 김용환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사실을 우리는 오랫동안 모르고 있을 뿐. 어쨌든 우리가 이순신에 관해 떠올릴 수 있는 시각적 상상력의 영토는 결코 김용환이 해낸 작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한 개인의 노력으로 숱한 사람들의 지식과 문화적 경험의 층위를 이만큼 결정적으로 구성한 사례가 또 있을까 싶다.
 
 
코주부 김용환에게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유독 많이 따라다닌다. 최초의 만화단행본을 발간했고, 최초의 만화잡지를 발간했고, 현대적 시사만화의 창안자이기도 하고,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최초의 여성만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또한 어린이만화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만화에 관한 그의 남다른 열정이 만들어낸 성과들인 것이다. 그는 우리 만화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의 한복판에서도 만화가의 특별한 이력을 각인시켰다.
그는 만화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은 풍속화, 역사화, 신문소설 삽화, 책 표지 그림, 달력 등의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영역에서 펼쳐졌고, 그가 만들어놓은 성과들은 당대의 시각적 경험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개인사적으로는 파란만장하다고 할 만한 삶의 여정을 겪어야 했지만, 그는 자신이 어디에 서 있든 열정적으로 많은 것을 뿌려놓았다.
그는 본격적인 조명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불러내야 할 것이다. 틀림없이.
 
글 / 김수기(현실문화연구)
 


[FF Magazine] Forever - 김용환 _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
 


 
요즘 세대들에게 김용환이라는 이름은 퍽이나 낯설 것이다. 코주부라는 말도 한번쯤 들어봄직은 할지언정 그 실체를 알고 있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코주부 김용환은 그렇게 잊혀진 존재다. 김용환이 국내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가 해방공간과 1950년대이니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에 관한 소개는 옛날 잘 나가던 만화가이자 출중한 실력을 겸비한 삽화가 정도로 소개하는 글이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정도다. 만화 마니아이자 한때 잠시나마 만화출판도 하면서 만화와의 인연을 나름 맺고 있는 필자의 경우도 그를 알게 된 것이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으니, 그가 우리들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코주부 김용환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사람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그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박재동, 허영만 등 오늘날의 만화 대가들이 <코주부 삼국지>와 같은 만화적 토양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만화가에 대한 꿈을 키웠다는 고백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하지만 이것도 그에 대한 설명으로는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의 만화와 그림은 단지 지나간 시기의 박제된 유물이 결코 아니다. 그가 일궈낸 이미지의 세계는 오늘날의 우리들과도 씨줄날줄로 엮여 있다.
 
 
만화에 관한 김용환의 에피소드 중에는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다. 중학교 입학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 일면을 보게 해준다. 열다섯에 부산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한 김용환은 다음 해인 1926년에 또 응시하게 된다. 공부에 소질이 없었던 그는 시험지를 백지로 내는 대신에, 당시 신문에서 연재되던
<멍텅구리 헛물켜기>의 한 장면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합격을 기대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미술선생님이 김용환의 특별한 재능을 간파하여 도와준 덕택에 그는 간신히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네 칸 만화인 <멍텅구리 헛물켜기>가 1924년 말에 선보이기 시작했으니, 소년 김용환은 우리 만화 태동기의 열렬한 독자였던 것이다. 이 에피소드의 경우도 그렇지만 김용환을 둘러싼 에피소드들은 만화와 그림에 대한 그의 출중한 능력과 순진무구한 열정을 느끼게 한다.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1931년 일본으로 간 김용환은 간판집에서 일하는 한편 거리의 초상화가로 일하면서 생활을 꾸려나갔다. 그리고 미술학교 재학 중 일본인 급우의 소개로 일본의 이름난 삽화가의 조수로 일하는 중에 한 소년잡지에 응모한 펜화가 채택된다. 이후 김용환은 ‘기타코지’라는 필명으로 펜화가로서 전설적인 명성을 떨치기도 한다. 해방이 되기 직전인 1945년 5월에 김용환은 일본의 유명 출판사인 고단샤의 직원 신분으로 귀국한다. 서울에서 일본의 징병제도를 홍보하는 시국잡지의 편집 일을 맡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곧 그는 이어 해방을 맞는다.
 
 
해방 이전의 김용환의 활약이 일본에서 펜화를 중심으로 한 삽화가 주된 것이었다면, 해방 이후로는 삽화가보다는 만화가로서의 면모를 더욱 두드러지게 펼쳐 보인다. 해방 이전에 일본에서 명망 있는 펜화가로 활동할 때에도 국내 잡지에 만화를 소개하긴 했지만, 우리 만화사에 획을 그을 만한 성과들을 연달아내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에 들어서다.

무엇보다도 해방공간에서 그가 쏟아낸 시사만화는 이전 김용환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만은 아니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시사만화의 창안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해방공간에서 시사만화로 특출난 성과를 쏟아낸다. 우리 만화사의 시작으로는 1909년 <대한민보>에 1년 가까이 연재한 이도영의 한 컷짜리 만화를 든다. 사태를 정확하게 요약하여 독자들에게 설득력 있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만화라는 매체의 가능성이 근대기 벽두에 기적처럼 발현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도영의 놀라운 성과는 폭압적인 검열과 통제로 인해 식민 지배 하에서 더 이상 계승되지 못하고 말았다. 이도영이 개시한 만화는 우리 만화사의 시작임과 동시에 시사만화의 시작이기도 했다. 특히 시사만화는 식민 공간 어디에서도 발붙이지 못하고 해방을 맞았는데, 김용환이 정확하게 그 단절의 역사를 이어주었던 것이다.

김용환의 작품은 시사만화가 갖추어야 할 요건을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었다. 정세에 대한 정확한 판단, 정치적 입장,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명료함, 현대적인 그림체 등 모든 면에서 현대적인 시사만화의 전형이라 할만 했다. 1947년에 발표한 <삼팔선 블루스>를 예로 보자. 해방이 되었으되 소련과 미국의 새로운 식민 지배를 받다시피 한 당시의 형국을 날카롭게 뚫어보고 있다. 한 여인을 두고 상반신은 소련군과 함께, 하반신은 미국군과 함께 춤을 추고 있는 이 장면은 분단 한국의 운명을 정확하게 감지하고 있는 듯하다.
김용환이 쏟아내는 시사만화의 수준을 보노라면 식민지의 굴레에서 갓 벗어난 당시 시민사회의 활기와 역량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김용환 이후의 시사만화는 오랫동안 정치적 상황에 대해 우회적인 방식으로만 언급할 수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의 시사만화는 이승만정권의 탄압으로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1948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만화잡지를 발간하지만 정부의 폐간 조치로 2호에 그치고 만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주간으로 발행되는 만화신문을 창간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듬 해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이마저도 중단되고 만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그의 만화 인생 또한 극적으로 바뀌어야만 했다. 이승만의 한강다리 폭파로 미처 피난하지 못한 김용환은 결국 인민군에 체포되고 만다. 남한에서 유명인사로 펼친 활약을 빌미로 그는 반동분자로 낙인찍힌다. 다행히 인민군 역시 만화의 정치적 활용 가능성을 인식하고 김용환의 능력을 선전도구로 활용하게 되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다. 인민군 미술대에서 부역 활동을 하게 된 김용환은 이승만이 김일성의 구둣발에 채여 부산 앞바다에 코를 빠트리고 있는 대민 선전용 포스터를 그렸다고 한다. 몇 달 후에 상황은 또 다시 바뀌었다. 9월 28일에 서울이 수복되자 이번에는 인민군 부역 혐의로 수감된다. 다행히 만화가 김용환의 능력을 알아본 한 장교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하는 대신, 이번에는 김일성이 국군에 쫓겨 두만강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죽는 대민 선전용 포스터를 그리게 된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환경은 만화를 정치적 무기로 변화시켰다. 상대 진영의 취약한 고리를 파고들어 피아의 전투력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이데올로기 선전활동이 만화를 매개로 치열하게 펼쳐졌던 것이다. 이 당시에 생산된 이미지들 가운데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삐라’다. 당시에 유통되던 ‘삐라’의 표현 방식은 거의 만화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세를 단 몇 줄로 압축하든 과장을 하든 정서적 반응을 강력하게 환기시키든, 만화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 / 읽을 수 없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가장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최적의 매체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당시에 만화를 두고 펼쳐지는 이데올로기적 싸움은 또 다른 차원의 강력한 전쟁이었으며, 김용환 역시 자의든 타의든 이 소용돌이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52년 말에 김용환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싸움과는 대척점에 있는 듯이 보이는 어린이만화를 한국에서 처음으로 선보인다. 이데올로기적 선전의 일환으로 복무할 수밖에 없었던 만화로부터 탈피해 새로운 돌파구로 착안한 것이었을 성싶다.

 
 
 

코주부라는 캐릭터는 김용환을 대변하기도 한다. 유머러스하고 소탈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친근한 이미지의 캐릭터가 다름 아닌 김용환이었다는 진술은 당시 그를 아는 지인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코주부를 닮은 캐릭터들이 펼쳐내는 김용환의 만화 세계는 그의 성격에도 가장 부합하는 듯이 보인다. 특히 어린이만화에서 코주부의 캐릭터는 가장 성공적으로 구현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단행본 만화인 <홍길동의 모험>을 비롯해서 잡지 <학원>에 연재될 때부터 폭발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코주부 삼국지>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는 코주부 캐릭터를 내세워 어린이만화라는 새로운 영역과 시장을 성공적으로 개척해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성공하는 듯했다.
하지만 어린이만화의 성공은 예기치 않은 부작용을 낳았다. 어린이만화책이 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어린이만화책을 쏟아내는 바람에 시장은 혼탁해지고 질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는 독점적인 유통업체가 뛰어들어 만화가 더 이상 서점이 아닌, 만화방이라는 기형적인 유통체계를 통해 유통되는 현상이었다. 만화가에게나 만화출판가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만화방 유통체계는 이후 한국만화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게 된다.
또한 일본이나 유럽에서 만화가 성인들의 독서의 일환으로 정착되는 것과 달리, 만화를 어린애들의 오락쯤으로 여기는 편견도 이때부터 생긴다. 질 낮은 어린이만화의 범람과 만화방 유통체계는 만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부정적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만다. 만화를 둘러싼 혼탁한 상황에 직면하여 김용환은 해방공간과 1950년대에 걸쳐 열정적으로 펼친 만화인생을 정리하고 다시 일본으로 향한다.

 
 
 
김용환은 1959년에 한국을 떠나 도쿄에 있는 미군 극동사령부의 작전국 심리전과에서 1972년까지 근무하게 된다. 미군 극동사령부는 1955년부터 <자유의 벗>이라는 잡지를 매달 발간하여 전국의 관공서와 학교는 물론 농촌의 마을 단위에 이르기까지 배포된 일종의 미군 홍보지였다. 김용환은 이 잡지에서 표지 그림을 맡았다. <자유의 벗>의 표지는 상당 부분 한국적 소재를 다룬 이미지로 채워져 있었다. 한국의 풍속, 역사, 전통을 친근하게 되살리는 듯한 이들 이미지는 앞뒤 표지에 컬러로 인쇄되어 그림의 맛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게 했다. 당시 물자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을 감안하면 양질의 종이로 만들어진 <자유의 벗>의 컬러 표지는 주목을 받기에 충분할 터. 거기에 김용환의 세밀한 풍속화가 곁들여졌으니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것은 당연했다.
사실 <자유의 벗>이 미군의 홍보지였던 만큼 사람들의 특별한 관심을 끌만한 매체는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인을 대상으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고 미군의 존재를 홍보하기 위한 목적은 김용환의 탁월한 삽화 덕택에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자유의 벗>이 표지 그림으로 인해 얼마나 큰 반향을 이끌어냈는지는 이미 4,50여 년이 지난 세대들의 기억에서 쉽게 확인된다. 필자 역시 <자유의 벗>에 대한 기억은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각인되어 있다. <자유의 벗> 표지는 단연 돋보이는 눈요깃거리였다. 특히 농촌의 경우에는 교과서를 제외하곤 인쇄출판물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 시기를 보낸 많은 이들에게 <자유의 벗>은 강력한 시각적 주목을 이끌어냈던 문화적 경험이자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의 한 층위를 차지하고 있는 역사적 기록물이었다. 그만큼 <자유의 벗>은 당대의 특별한 경험의 일부로 받아들여졌다.
김용환의 삽화는 ‘한국적인’ 것이 어떤 것인지를 시각적으로 명료하게 입증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그림이 다루고 있는 내용들이 익숙한 한국의 풍속이나 역사적 내용을 많이 다루고 있는 데서 비롯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익숙한 것들은 자칫 상투적인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김용환의 그림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특히 세밀한 터치가 돋보여 마치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한 운동회의 장면이나 서울 구경하는 장면은 특정한 한 순간을 포착하여 화면으로 끌어온 듯한 생생함이 느껴진다.
김용환의 풍속화에는 코주부다운 특별함이 더해져 있다. 따뜻함이다. 필시 그가 생각하는 ‘한국적인 것’은 그의 성품만큼이나 따뜻한 것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는 따스함을 연상시킨다. 아마도 나라 밖으로 떠나 있었던 데서 생긴 고국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나이가 들면서 더욱 진하게 배인 것 같다. 또한 그의 풍속화에는 공동체의 연대감이 살아 있다. 한국적 풍속을 다룬 그의 많은 그림들이 사람들과의 어울림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식민지의 암울한 역사와는 아랑곳없는 여유와 따뜻한 유머, 낙천적인 분위기가 한국민의 공동체적 연대감을 더욱 고취시키고 있다.
우리는 김용환이 그린 풍속화에서 당대의 열망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삶과 역사에 대한 긍정, 온전히 변함없는 모습으로 전승되어야 할 것에 대한 희구, 타자(미국이든 일본이든)의 시선에 당당할 수 있는 자신감 같은 것들이 그런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한국적’ 이미지는 <자유의 벗>에 실려 그 시대를 대변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그는 그 시대의 ‘한국적’ 이미지의 창안자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김용환은 평생에 걸쳐 이순신과 그의 전적을 다룬 그림들을 그렸다. 심지어 일본의 한 군사잡지에서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 등에 대한 글을 3년여에 걸쳐 연재를 할 만큼 이순신에 대한 연구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충무공 이순신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식민 지배에 대한 경험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주간 만화잡지였던 <만화뉴스>의 기사로 해군을 취재하던 차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를 탐사하면서 본격적인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이순신 장군에 관한 그의 이미지 작업은 만화로, 역사화(달력, 잡지, 단행본)로, 펜화로, 슬라이드로 구현된다. 가히 전방위적인 영역에 걸친 작업이다. 특히 우리가 알고 있는 거북선에 대한 이미지는 전적으로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노량해전이나 명량해전과 같은 충무공의 활약상에 대한 시각적 이미지 작업 역시 거의 그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더욱이 한국인이라면 성장 과정에서 숱하게 접했을 이순신에 관한 이미지의 생산자가 바로 코주부 김용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순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그리고 이순신 장군에 대한 시각적 경험의 상당 부분을 김용환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사실을 우리는 오랫동안 모르고 있을 뿐. 어쨌든 우리가 이순신에 관해 떠올릴 수 있는 시각적 상상력의 영토는 결코 김용환이 해낸 작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한 개인의 노력으로 숱한 사람들의 지식과 문화적 경험의 층위를 이만큼 결정적으로 구성한 사례가 또 있을까 싶다.
 
 
코주부 김용환에게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유독 많이 따라다닌다. 최초의 만화단행본을 발간했고, 최초의 만화잡지를 발간했고, 현대적 시사만화의 창안자이기도 하고,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최초의 여성만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또한 어린이만화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만화에 관한 그의 남다른 열정이 만들어낸 성과들인 것이다. 그는 우리 만화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의 한복판에서도 만화가의 특별한 이력을 각인시켰다.
그는 만화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은 풍속화, 역사화, 신문소설 삽화, 책 표지 그림, 달력 등의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영역에서 펼쳐졌고, 그가 만들어놓은 성과들은 당대의 시각적 경험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개인사적으로는 파란만장하다고 할 만한 삶의 여정을 겪어야 했지만, 그는 자신이 어디에 서 있든 열정적으로 많은 것을 뿌려놓았다.
그는 본격적인 조명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불러내야 할 것이다. 틀림없이.
 
글 / 김수기(현실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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