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사진으로 보는 초창기 국민대학교

  • 06.03.28 / 이정인
「동아일보」 1946년 12월 27일자
학생 모집 광고.
국민대학교는 민족의 대학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안고 설립되었지만, 재단을 확보하지 못하여 건학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 중에도 교사(校舍)를 마련하지 못해 겪는 어려움이 가장 컸다. 설립준비위원회가 발족되고, 신학기에 맞추어 학생모집 광고를 냈지만 교사는커녕 원서를 접수할 사무실도 마련하지 못한 처지였다. 궁여지책으로 종로구 필운동 소재 한옥집 대문칸을 임시로 빌어 헌 책상 한 개를 놓고 흰 종이에 ‘국민대학교 신입생 입학원서 접수처’라고 써 붙이고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어렵사리 입학원서를 마감한 후에는 종로구 내수동에 있던 보인상업고등학교의 교실을 빌어 입학시험을 치르는 웃지 못할 광경이 연출되었다. 그러나 국민대학교에 지원하려는 학생들의 열기는 다른 대학보다 뜨거워 당시 입학시험 경쟁률은 7대 1에 달할 정도로 높았다.

1946년 9월 1일의 개교를 앞두고서야 어렵게 보인상업학교 별관 2층 건물을 빌릴 수 있었다. 이것이 국민대학교의 첫 교사였다. 아래층에는 학장실과 사무실, 강의실 하나를, 위층에는 넓은 강의실 2개를 마련하였다.

초창기 입학시험장 1946년 국민대학 입학시험
은 경쟁률이 7대 1에 달할 정도로 높았다.
보인상업학교 건물 1946년 9월 1일 국민대학교는
보인상업학교 별관 2층 건물을 빌려 개교할 수 있었다.
사진은 1947년 2월 당시 모습.

야간대학으로 출발한 초창기 국민대학교 학생들은 직장에 몸담고 있었지만, 향학열에 불타는 뜻있는 젊은이들이었다. 나이든 학생들도 있어, 개교 당시 1회 학부생들의 나이는 20세에서 50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 중에는 다른 대학에 다니다가 입학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일본의 교토대(京都大)를 졸업하거나, 서울대에 재학하던 학생들이 편입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1회 졸업생인 남덕우(전 총리)·김성기(전 국민대 교수)·남광우(전 인하대 교수) 등이 그러한 경우였다.

편입생들 가운데는 국민대학교가 단순히 야간대학이라서가 아니라, 임시정부나 해공 선생 같은 분이 세운 대학이기에 독립운동 정신과 높은 뜻을 이어받기 위해 온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 학생들은 주경야독하며 2개의 도시락을 싸와 점심은 직장에서, 저녁은 학교에서 먹으며 면학에 전념하였다.

강의실 모습
이무렵 국민대학교는 여러 면에서 타대학의 모범이 되었다. 우선 해공의 뜻을 받들어 등록금을 다른 대학보다 싸게 책정했으며, 재원이 부족해서 교수의 급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보결입학이나 기부금을 절대 받지 않음으로써 학원운영의 청렴성을 유지하였다.국민대학교는 가난한 대학이었지만, 교수님들은 석학에 명강의로 서울의 대학가에서 떠들썩하게 회자되었다. 덕분에 주간 강의를 받는 타대학의 많은 학생들이 낮 공부를 끝낸 후 국민대학교 야간 강의를 도강하였기 때문에 강의실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심지어는 본교생이 강의를 들을 수 없을 만큼 도강이 무성하여 타교생의 도강을 막는 일까지 일어날 정도였다고 한다. 초창기 본교생의 고시합격률이 전국에서 1,2위를 다툴 만큼 실력이 우수했던 것은 훌륭한 교수진과 뜨거운 면학분위기 때문이었다.

개교 초기 학생 정원은 학부와 전문부로 나누어져 법률학과·정경학과 각각 50명씩 100명이었으나, 1947년 ‘국민대학’으로 승격되면서 정치학과 50명이 증원되어 150명이 되었다. 전문부는 폐지되고 야간에서 주간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국전쟁 하루 전인 1950년 6월 24일에는 개교이래 첫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원래 졸업식은 3월에 거행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늦어진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1950년 초 학장 신익희에 대한 재단측의 일방적인 해임사건으로 문교부는 신익희 학장 명의로 된 학위수여증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자 학생들은 신익희 학장 명의의 학위수여증이 아니면 받을 수 없다고 맞서 싸웠다. 마침내 문교 당국의 묵인아래 졸업식 기한을 3개월 넘긴 뒤, 첫 학위수여식이 거행되었던 것이다. 문교부의 승인이 없는 학장의 자필로 서명된 졸업장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민족대학’인 국민대학교에 입학하여 학교를 내집같이 생각하면서 지키고 건설해 갔던 초기 학생들의 학교와 해공에 대한 애착심과 존경심은 이같이 남다른 데가 있었다.

제1회 졸업증서(1950년 6월 24일)
1회 졸업식 다음날에는 민족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발했다. 국민대학도 6월 27일 휴교되었고 서울에 있는 다른 대학처럼 국민대학교도 공산당에서 파견한 책임자에게 학교운영이 넘어가서 ‘국민대학’이 ‘인민대학’으로 간판이 바뀌는 일도 일어났다.

전쟁이 지속되자 부산으로 피난하여 ‘국민대학교 연락사무소’를 운영하던 학교당국은 1951년4월 부산역 건너편 영주동에 있는 양재(洋裁)학원을 월세로 얻어 임시대학을 개강하였다.이처럼 부산 피난 시절에도 국민대학교는 임시대학을 개설하여 착실하게 안정 기반을 구축하여 갔다. 1953년 4월 1일 부민동 행복산 단독 가교사로 이전하기 직전인 3월 27일 제4회 졸업식이 부산 부민관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피난지 부산에서 거행된 마지막 졸업식이었다. 약 2년여의 부산 피난 생활 중, 제2회·제3회·제4회 등 3차에 걸친 졸업식이 있었다.

학생총회(1952년) 한국전쟁시 졸업식 광경(1952년 3월 30일)부산 피난
시절 임시대학이 개설되어 제3회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국민대학교는 부산에서의 임시대학 운영을 마치고, 1953년 9월 1일 제2학기 개강을 다시 서울 창성동 교사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사진으로 보는 초창기 국민대학교
「동아일보」 1946년 12월 27일자
학생 모집 광고.
국민대학교는 민족의 대학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안고 설립되었지만, 재단을 확보하지 못하여 건학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 중에도 교사(校舍)를 마련하지 못해 겪는 어려움이 가장 컸다. 설립준비위원회가 발족되고, 신학기에 맞추어 학생모집 광고를 냈지만 교사는커녕 원서를 접수할 사무실도 마련하지 못한 처지였다. 궁여지책으로 종로구 필운동 소재 한옥집 대문칸을 임시로 빌어 헌 책상 한 개를 놓고 흰 종이에 ‘국민대학교 신입생 입학원서 접수처’라고 써 붙이고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어렵사리 입학원서를 마감한 후에는 종로구 내수동에 있던 보인상업고등학교의 교실을 빌어 입학시험을 치르는 웃지 못할 광경이 연출되었다. 그러나 국민대학교에 지원하려는 학생들의 열기는 다른 대학보다 뜨거워 당시 입학시험 경쟁률은 7대 1에 달할 정도로 높았다.

1946년 9월 1일의 개교를 앞두고서야 어렵게 보인상업학교 별관 2층 건물을 빌릴 수 있었다. 이것이 국민대학교의 첫 교사였다. 아래층에는 학장실과 사무실, 강의실 하나를, 위층에는 넓은 강의실 2개를 마련하였다.

초창기 입학시험장 1946년 국민대학 입학시험
은 경쟁률이 7대 1에 달할 정도로 높았다.
보인상업학교 건물 1946년 9월 1일 국민대학교는
보인상업학교 별관 2층 건물을 빌려 개교할 수 있었다.
사진은 1947년 2월 당시 모습.

야간대학으로 출발한 초창기 국민대학교 학생들은 직장에 몸담고 있었지만, 향학열에 불타는 뜻있는 젊은이들이었다. 나이든 학생들도 있어, 개교 당시 1회 학부생들의 나이는 20세에서 50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 중에는 다른 대학에 다니다가 입학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일본의 교토대(京都大)를 졸업하거나, 서울대에 재학하던 학생들이 편입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1회 졸업생인 남덕우(전 총리)·김성기(전 국민대 교수)·남광우(전 인하대 교수) 등이 그러한 경우였다.

편입생들 가운데는 국민대학교가 단순히 야간대학이라서가 아니라, 임시정부나 해공 선생 같은 분이 세운 대학이기에 독립운동 정신과 높은 뜻을 이어받기 위해 온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 학생들은 주경야독하며 2개의 도시락을 싸와 점심은 직장에서, 저녁은 학교에서 먹으며 면학에 전념하였다.

강의실 모습
이무렵 국민대학교는 여러 면에서 타대학의 모범이 되었다. 우선 해공의 뜻을 받들어 등록금을 다른 대학보다 싸게 책정했으며, 재원이 부족해서 교수의 급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보결입학이나 기부금을 절대 받지 않음으로써 학원운영의 청렴성을 유지하였다.국민대학교는 가난한 대학이었지만, 교수님들은 석학에 명강의로 서울의 대학가에서 떠들썩하게 회자되었다. 덕분에 주간 강의를 받는 타대학의 많은 학생들이 낮 공부를 끝낸 후 국민대학교 야간 강의를 도강하였기 때문에 강의실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심지어는 본교생이 강의를 들을 수 없을 만큼 도강이 무성하여 타교생의 도강을 막는 일까지 일어날 정도였다고 한다. 초창기 본교생의 고시합격률이 전국에서 1,2위를 다툴 만큼 실력이 우수했던 것은 훌륭한 교수진과 뜨거운 면학분위기 때문이었다.

개교 초기 학생 정원은 학부와 전문부로 나누어져 법률학과·정경학과 각각 50명씩 100명이었으나, 1947년 ‘국민대학’으로 승격되면서 정치학과 50명이 증원되어 150명이 되었다. 전문부는 폐지되고 야간에서 주간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국전쟁 하루 전인 1950년 6월 24일에는 개교이래 첫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원래 졸업식은 3월에 거행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늦어진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1950년 초 학장 신익희에 대한 재단측의 일방적인 해임사건으로 문교부는 신익희 학장 명의로 된 학위수여증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자 학생들은 신익희 학장 명의의 학위수여증이 아니면 받을 수 없다고 맞서 싸웠다. 마침내 문교 당국의 묵인아래 졸업식 기한을 3개월 넘긴 뒤, 첫 학위수여식이 거행되었던 것이다. 문교부의 승인이 없는 학장의 자필로 서명된 졸업장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민족대학’인 국민대학교에 입학하여 학교를 내집같이 생각하면서 지키고 건설해 갔던 초기 학생들의 학교와 해공에 대한 애착심과 존경심은 이같이 남다른 데가 있었다.

제1회 졸업증서(1950년 6월 24일)
1회 졸업식 다음날에는 민족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발했다. 국민대학도 6월 27일 휴교되었고 서울에 있는 다른 대학처럼 국민대학교도 공산당에서 파견한 책임자에게 학교운영이 넘어가서 ‘국민대학’이 ‘인민대학’으로 간판이 바뀌는 일도 일어났다.

전쟁이 지속되자 부산으로 피난하여 ‘국민대학교 연락사무소’를 운영하던 학교당국은 1951년4월 부산역 건너편 영주동에 있는 양재(洋裁)학원을 월세로 얻어 임시대학을 개강하였다.이처럼 부산 피난 시절에도 국민대학교는 임시대학을 개설하여 착실하게 안정 기반을 구축하여 갔다. 1953년 4월 1일 부민동 행복산 단독 가교사로 이전하기 직전인 3월 27일 제4회 졸업식이 부산 부민관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피난지 부산에서 거행된 마지막 졸업식이었다. 약 2년여의 부산 피난 생활 중, 제2회·제3회·제4회 등 3차에 걸친 졸업식이 있었다.

학생총회(1952년) 한국전쟁시 졸업식 광경(1952년 3월 30일)부산 피난
시절 임시대학이 개설되어 제3회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국민대학교는 부산에서의 임시대학 운영을 마치고, 1953년 9월 1일 제2학기 개강을 다시 서울 창성동 교사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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