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인! 국민인!!

방송인 임백천(건축 78학번)의 내 인생 48년

  • 05.12.30 / 박정석
풀쩍 뛰어오르는 모양새가 벌써 제 세상을 만난 것 같다.
2006년 병술년, 개 해를 맞아 그 유명한 ‘58년 개띠’인
가수 겸 MC임백천씨가 허공에 플래시 불빛으로 개를 그렸다.
"나이 밝히는 자리여서 젊게 보이려고 청바지를 입고 왔다"는
그는 촬영이 시작되자 "개띠 파이팅!"을 외쳤다.


2006년 병술년(丙戌年)이 내일 모레다. 개의 해. 개 해라고 닭 해와 뭐 다를 게 있겠나 싶지만 공연히 부지런 떠는 닭보다는 늘어진 '상팔자'를 누리는 개를 닮은 한 해가 되길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가졌으리라. '한국인이 다른 나라 사람보다 적게 자고 많이 일한다'는 슬픈 통계를 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본디 해마다 상응하는 띠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희망을 좀 더 갖게 마련이다. 그런데 개띠들은 좀 다르다. 유독 '튀는' 해가 있다. '46 개띠'란 말도, '70 개띠'란 말도 없는데 유별나게 '58 개띠'만 있다. 한 해에 태어난 사람의 성격과 운명이 모두 같을 수 없는데도 묘하게 1958년 난 개띠에게는 군중 속에 섞여 있어도 도드라지는 그들만의 공통점이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문자 그대로 상팔자일 수도 있고 앞뒤로 치이는 '낀 세대'일 수도 있다. 지천명(知天命)을 눈 앞에 둔 그들이 유난히도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정면에서 바라봐야 했던 까닭일까. 58 개띠가 모든 개띠를 대표할 순 없지만 2006년 개띠해를 맞아 이 '별난 개띠'들의 키워드를 살펴봤다. 58년 태어나 별 수 없이 58 개띠가 돼야 했던 가수 겸 MC 임백천씨의 눈을 빌렸다.

글 = 이훈범.남궁욱 기자 - CIELBLEU@JOONGANG.CO.KR
사진 = 권혁재 전문기자 - SHOTGUN@JOONGANG.CO.KR


#1 베이비붐 - 한 학년만 1600명

임백천씨는 58년 지방에서 태어났지만 서울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마쳤다. 정부 주도로 본격적인 산아제한 운동이 시작된 것은 60년대. 따라서 전쟁이나 불황 이후 출생률이 높아지는 베이비붐 현상은 한국에서 50년대 말 정점에 이르렀다. 그중에서도 특히 58년에 많이들 낳은 모양(놀랍게도 통계청은 관련 자료를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58 개띠들은 "동창이 많아 다 알 수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백천씨도 마찬가지. 덕수초등학교를 다닌 그는 말한다. "저희 반이 그때 70명쯤 됐나? 12반까지 있었고. 게다가 오후에 등교하는 오후반 아이들이 또 그만큼 있었어요. 그러니 동기만 1600명은 넘은 거죠. 전국 어딜 가나 비슷했을 겁니다. 그러니 교실은 '콩나물 시루'였고, 화장실 앞엔 늘 줄이 있었어요. 신체검사만 해도 하루가 갔죠."

10년 전쯤 영화화됐던 소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외국 영화에 영향을 받고 자란 세대 이야기다. 58 개띠들이 바로 이런 할리우드 키드 중 하나다. 백천씨는 이것도 베이비붐의 영향 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학창 시절 내내 동급생이 많았어요. 그러니 선생님들도 일일이 신경을 쓸 수가 없었죠. 그래서 당시엔 등교하자마자 가방만 던져놓고 영화 보러 다니는 학생이 많았어요. 나도 그중 하나였고(웃음). 그래도 빠진 티가 안 나니 별로 혼날 일도 없었죠."


#2 뺑뺑이 - 동문회의 '구박'

58 개띠들은 '뺑뺑이(추첨제) 1세대'라고 불린다. 이 말에는 58년생들을 깔보는 어감이 담겨있다. 57년생이 고교에 입학한 73년까지만 해도 고교입시가 치열했다. 그러나 58년생들이 고입을 준비하던 중2 겨울, 갑자기 서울의 고입이 추첨제로 바뀌었다. 개띠들은 책을 덮고 주소부터 확인해야 했다. 물론 기뻐한 학생이 더 많았을 터. 하지만 명문고를 바라보고 쌍코피를 흘려가며 공부했던 우등생들의 허탈함이란…. 게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이상한 꼬리표도 붙었다. 백천씨 증언. "나도 주소에 따라 여의도고에 2회로 진학했어요. 아쉽긴 했지만 크게 억울할 것도 없었죠. 그런데 소위 명문이라 불리는 K나 S고교에 간 친구들은 힘들어 했어요. 선배들이 '너희가 학교 평균 다 깎아 먹는다'며 구박했기 때문이죠." 이런 '누명'은 지금도 이어진다. 고교 인맥은 없는 셈치는 게 편한 일. 동문회에서조차 "뺑뺑이들은 저쪽 구석으로 가라"는 농담 섞인 박대를 받기 일쑤다.

더 억울한 건 고등학교를 거저(?) 들어갔다고 58 개띠의 입시운이 좋았던 게 결코 아니라는 점. 어차피 치러야 했던 대입에선 베이비붐 세대답게 경쟁률이 엄청났다. 재수를 한 뒤 78학번으로 국민대 건축학과에 들어간 백천씨는 말한다. "예비고사를 친 뒤 본고사를 또 봐야 했어요. 대학마다 전형이 달랐는데, 경쟁률 높은 곳은 20~30대 1도 됐죠. 정말 지긋지긋했죠. 게다가 재수 학원도 시험까지 보고 들어갔는데, 그 학원에도 한 반이 50명은 됐어요. 말 다했죠."



#3 영식(令息) - 대한민국 최고의 빽?

시험을 치러야 좋은 중학교에 갈 수 있던 때가 있었다. 당시 초등학생들은 4학년부터 밤샘공부를 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1958년생이 중학교에 들어가기 바로 두 해 전에 서울부터 사라졌다. 역시 뺑뺑이로 전환된 것. 이상하게 58 개띠들 앞에는 늘 뺑뺑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이 받은 '혜택(?)'은 또 있다. 바로 제2외국어 증발. 74년 고등학교에 입학한 개띠들은 제2외국어를 배웠다. 독어.프랑스어.스페인어 등. 그런데 "구텐 모르겐(봉주르 또는 부에노스 디아스)" 정도나 배웠을까. 갑자기 정부가 "제2외국어 과목을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학생들은 어리둥절했고, 일자리를 잃은 선생님들은 눈물을 흘리며 학교를 떠났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두고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이 모두가 대통령 아들 박지만씨 때문이라는 것. 58 개띠인 지만씨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문교부 장관이 입시 제도를 바꿨고 제2외국어도 없앴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동갑내기의 '빽'을 믿던 개띠들 중엔 "대입도 곧 추첨제로 바뀔 텐데…"라며 아예 공부를 멀리한 이들도 있었단다.

그런데 평범한 학생이던 백천씨가 '영식'이라 불리던 지만씨와 친구가 됐다. 둘은 4년 전께 친지의 결혼식에서 만나 교분을 텄다. 친해진 뒤 백천씨가 학창시절 소문에 대해 물은 것은 당연한 일. 지만씨는 답했단다. "그런 소문이야 알고 있었지. 그런데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어. 진짜."


#4 목격자 - 학도호국단에서 '서울의 봄'까지

58 개띠는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지켜본 '목격자 세대'이기도 하다. 물론 4.19 혁명(60년)과 5.16 군사 쿠데타(61년) 때는 걸음마나 뗐을 법한 나이. 그러나 철이 들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철권통치'를 몸소 체험해야 했다. 겨우 철이 들 무렵 130여 개의 단어로 이뤄진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워야 했고, 갓 개통한 경부고속도로변으로 대통령 '마중'도 나가야 했다. '학도호국단'이라는 이름으로 교련복을 입고 연병장 같은 운동장을 박박 기던 고등학교 때는 영부인이 피살되는 사건도 목도한다. 백천씨는 "세종로에서 영부인 운구차가 지나가는 장면을 봤다"며 "'대통령=박정희'라고 믿던 때라 그 영부인이 사망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어요. 눈물을 흘리는 아이도 많았죠"라고 회상한다.

58 개띠들이 대학문화의 주축이던 79년에는 그 '남편'까지 총탄에 쓰러졌다. 온 나라는 충격과 함께 혼란에 휩싸였고, 이들은 군사독재를 종식할 기회라며 거리로 뛰쳐나갔다. 78년 대학가요제를 통해 데뷔한 백천씨도 이 대열에 서야 했다. "그때 벌써 쇼 MC를 맡고 있었어요. 그래도 '데모'에는 참가했죠. 시위가 시작되기 전에 앞에 나가 '아침이슬' 같은 노래를 불렀어요. 그리고 시위가 시작되면 기타를 싸들고 방송국으로 갔죠. 참 고민이 많은 시기였어요."

개띠들의 마음 고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듬해 찾아왔던 짧은 '서울의 봄'. 그 뒤를 따라온 광주학살과 계엄령, 그리고 휴교령. 이런 순서를 밟아 기어코 탄생한 또 한 명의 '군인 대통령'. 어느 쪽으로 구르는지 모르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지켜보는 젊음은 괴로웠다.


#5 낀 세대 - 위에선 누르고 밑에선 치받고

"노동3권 보장하라! 보장하라!" "시끄럿! 노동3권이 뭔 줄이나 알아?" "……."

백천씨가 떠올리는 80년대 초반 경찰서 유치장의 풍경이다. 이렇게 당시 58 개띠 중엔 '학습'을 받지 못한 '운동권'이 많았다. 1학년 때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거리로 나선 '386세대'와 다른 점. 그렇다고 한.일협정 반대를 외치던 '이명박 세대'와도 달랐다. 민족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를 바라봤다는 점이 그렇다. 이렇게 58 개띠들은 커다란 선배와 강력한 후배 사이에 '낀 세대'였다.

당장 백천씨의 가수 인생만 해도 그렇다. 한대수.윤형주.송창식씨 등 1세대가 등장한 70년대 초반 포크는 가요계의 주류였다. 그러나 백천씨가 데뷔한 70년대 후반 이미 포크 음악은 밀려나고 있었다. 대신 이문세.변진섭씨 등의 '발라드'가 가요계를 휩쓸기 시작했다. 따라서 '포크 가수'로서 백천씨는 낀 세대다.

백천씨는 졸업 뒤 건축회사도 7년간 다녔다. 한국을 성장 궤도에 올려놓은 계기가 됐던 중동 특수 때 사우디아라비아에도 갔다. 하지만 일반적인 회사 생활에서도 58 개띠는 낀 세대였다. "우리가 과장 정도 되니까 컴퓨터란 물건이 나오더군요. 늘 이런 식이에요. 선배들은 '실력 없는 뺑뺑이 세대'로 취급하고, 후배들은 'PC 하나 못 다루는 퇴물'로 보죠."

마침 개띠가 갓 마흔을 넘던 98년 외환위기까지 한국을 강타했다. 당시 유행어는 '사오정(40~50대는 이미 정년)'. 이 유행어의 가장 어린 피해자가 바로 58 개띠였다. 백천씨는 말한다. "낀 세대로서 극심한 경쟁 속에 불행한 현대사까지 고스란히 체험한 게 우립니다. 바로 이런 점들이 58 개띠의 공통분모를 만든 게 아닐까요. 자기들끼리 잘 뭉치고, 살아남기 위해 늘 약간씩 튀려고 하는. 물론 그렇다고 선배들의 권위에 대놓고 도전도 못하지만…."


#6 선생님 - 아직'현역'인데 …

백천씨는 현재 MBC와 SBS-TV 프로그램을 맡고 있다. KBS에서도 라디오 DJ를 하고 있다. '방송 3사'를 꿰고 있는 것. 게다가 유니세프.환경부.서울시 등 수많은 단체의 홍보대사이기도 하다. 내년엔 15년 만에 새 앨범도 내볼까 생각 중. 물론 전문MC 김연주씨와의 사이에 1녀1남도 토실토실 잘 기르고 있다. 이만하면 누가 봐도 '현역'의 삶이다. 그런데 그의 귀에 요즘 자꾸 "선생님"이란 소리가 들린다. 어린 후배들이 존경심을 담는다고 부르는 호칭이다. 하지만 백천씨는 그 호칭이 불편하다. "아무리 편해도 '선생님'이 한 분 끼어 있으면 자리가 조심스러워지잖아요. 아직 젊은데 제가 벌써 그런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다니 섭섭합니다."

백천씨뿐이 아니다. 2006년을 코앞에 둔 이 시점에 58 개띠들은 어느 분야에서든 '관리자'라 불린다. 연예계로 따지면 '선생님'. 그러나 개띠들은 아직 그 호칭이 억울하다. 나이에 비해 파란만장한 경험을 했기에 후배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많다. 게다가 수만 많았지 한 번도 '주류'의 위치를 차지해 본 적도 없다. 그러니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여긴다. 이런 마당에 '예비역 취급'이 반가울 리 없다. 그래서 백천씨의 이런 마음이 58 개띠들에겐 남 얘기 같지 않을 것이다.

"저는 함께 일하는 이들에게 늘 '작은 오빠'라고 불러달라고 해요. 글쎄…아직은 딱 그 정도가 저한테 적당한 거 같아요. 아닌가요?(웃음)"


중앙일보 2005.12.29 15:24 입력 / 2005.12.30 06:31 수정
방송인 임백천(건축 78학번)의 내 인생 48년
풀쩍 뛰어오르는 모양새가 벌써 제 세상을 만난 것 같다.
2006년 병술년, 개 해를 맞아 그 유명한 ‘58년 개띠’인
가수 겸 MC임백천씨가 허공에 플래시 불빛으로 개를 그렸다.
"나이 밝히는 자리여서 젊게 보이려고 청바지를 입고 왔다"는
그는 촬영이 시작되자 "개띠 파이팅!"을 외쳤다.


2006년 병술년(丙戌年)이 내일 모레다. 개의 해. 개 해라고 닭 해와 뭐 다를 게 있겠나 싶지만 공연히 부지런 떠는 닭보다는 늘어진 '상팔자'를 누리는 개를 닮은 한 해가 되길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가졌으리라. '한국인이 다른 나라 사람보다 적게 자고 많이 일한다'는 슬픈 통계를 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본디 해마다 상응하는 띠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희망을 좀 더 갖게 마련이다. 그런데 개띠들은 좀 다르다. 유독 '튀는' 해가 있다. '46 개띠'란 말도, '70 개띠'란 말도 없는데 유별나게 '58 개띠'만 있다. 한 해에 태어난 사람의 성격과 운명이 모두 같을 수 없는데도 묘하게 1958년 난 개띠에게는 군중 속에 섞여 있어도 도드라지는 그들만의 공통점이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문자 그대로 상팔자일 수도 있고 앞뒤로 치이는 '낀 세대'일 수도 있다. 지천명(知天命)을 눈 앞에 둔 그들이 유난히도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정면에서 바라봐야 했던 까닭일까. 58 개띠가 모든 개띠를 대표할 순 없지만 2006년 개띠해를 맞아 이 '별난 개띠'들의 키워드를 살펴봤다. 58년 태어나 별 수 없이 58 개띠가 돼야 했던 가수 겸 MC 임백천씨의 눈을 빌렸다.

글 = 이훈범.남궁욱 기자 - CIELBLEU@JOONGANG.CO.KR
사진 = 권혁재 전문기자 - SHOTGUN@JOONGANG.CO.KR


#1 베이비붐 - 한 학년만 1600명

임백천씨는 58년 지방에서 태어났지만 서울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마쳤다. 정부 주도로 본격적인 산아제한 운동이 시작된 것은 60년대. 따라서 전쟁이나 불황 이후 출생률이 높아지는 베이비붐 현상은 한국에서 50년대 말 정점에 이르렀다. 그중에서도 특히 58년에 많이들 낳은 모양(놀랍게도 통계청은 관련 자료를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58 개띠들은 "동창이 많아 다 알 수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백천씨도 마찬가지. 덕수초등학교를 다닌 그는 말한다. "저희 반이 그때 70명쯤 됐나? 12반까지 있었고. 게다가 오후에 등교하는 오후반 아이들이 또 그만큼 있었어요. 그러니 동기만 1600명은 넘은 거죠. 전국 어딜 가나 비슷했을 겁니다. 그러니 교실은 '콩나물 시루'였고, 화장실 앞엔 늘 줄이 있었어요. 신체검사만 해도 하루가 갔죠."

10년 전쯤 영화화됐던 소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외국 영화에 영향을 받고 자란 세대 이야기다. 58 개띠들이 바로 이런 할리우드 키드 중 하나다. 백천씨는 이것도 베이비붐의 영향 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학창 시절 내내 동급생이 많았어요. 그러니 선생님들도 일일이 신경을 쓸 수가 없었죠. 그래서 당시엔 등교하자마자 가방만 던져놓고 영화 보러 다니는 학생이 많았어요. 나도 그중 하나였고(웃음). 그래도 빠진 티가 안 나니 별로 혼날 일도 없었죠."


#2 뺑뺑이 - 동문회의 '구박'

58 개띠들은 '뺑뺑이(추첨제) 1세대'라고 불린다. 이 말에는 58년생들을 깔보는 어감이 담겨있다. 57년생이 고교에 입학한 73년까지만 해도 고교입시가 치열했다. 그러나 58년생들이 고입을 준비하던 중2 겨울, 갑자기 서울의 고입이 추첨제로 바뀌었다. 개띠들은 책을 덮고 주소부터 확인해야 했다. 물론 기뻐한 학생이 더 많았을 터. 하지만 명문고를 바라보고 쌍코피를 흘려가며 공부했던 우등생들의 허탈함이란…. 게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이상한 꼬리표도 붙었다. 백천씨 증언. "나도 주소에 따라 여의도고에 2회로 진학했어요. 아쉽긴 했지만 크게 억울할 것도 없었죠. 그런데 소위 명문이라 불리는 K나 S고교에 간 친구들은 힘들어 했어요. 선배들이 '너희가 학교 평균 다 깎아 먹는다'며 구박했기 때문이죠." 이런 '누명'은 지금도 이어진다. 고교 인맥은 없는 셈치는 게 편한 일. 동문회에서조차 "뺑뺑이들은 저쪽 구석으로 가라"는 농담 섞인 박대를 받기 일쑤다.

더 억울한 건 고등학교를 거저(?) 들어갔다고 58 개띠의 입시운이 좋았던 게 결코 아니라는 점. 어차피 치러야 했던 대입에선 베이비붐 세대답게 경쟁률이 엄청났다. 재수를 한 뒤 78학번으로 국민대 건축학과에 들어간 백천씨는 말한다. "예비고사를 친 뒤 본고사를 또 봐야 했어요. 대학마다 전형이 달랐는데, 경쟁률 높은 곳은 20~30대 1도 됐죠. 정말 지긋지긋했죠. 게다가 재수 학원도 시험까지 보고 들어갔는데, 그 학원에도 한 반이 50명은 됐어요. 말 다했죠."



#3 영식(令息) - 대한민국 최고의 빽?

시험을 치러야 좋은 중학교에 갈 수 있던 때가 있었다. 당시 초등학생들은 4학년부터 밤샘공부를 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1958년생이 중학교에 들어가기 바로 두 해 전에 서울부터 사라졌다. 역시 뺑뺑이로 전환된 것. 이상하게 58 개띠들 앞에는 늘 뺑뺑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이 받은 '혜택(?)'은 또 있다. 바로 제2외국어 증발. 74년 고등학교에 입학한 개띠들은 제2외국어를 배웠다. 독어.프랑스어.스페인어 등. 그런데 "구텐 모르겐(봉주르 또는 부에노스 디아스)" 정도나 배웠을까. 갑자기 정부가 "제2외국어 과목을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학생들은 어리둥절했고, 일자리를 잃은 선생님들은 눈물을 흘리며 학교를 떠났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두고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이 모두가 대통령 아들 박지만씨 때문이라는 것. 58 개띠인 지만씨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문교부 장관이 입시 제도를 바꿨고 제2외국어도 없앴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동갑내기의 '빽'을 믿던 개띠들 중엔 "대입도 곧 추첨제로 바뀔 텐데…"라며 아예 공부를 멀리한 이들도 있었단다.

그런데 평범한 학생이던 백천씨가 '영식'이라 불리던 지만씨와 친구가 됐다. 둘은 4년 전께 친지의 결혼식에서 만나 교분을 텄다. 친해진 뒤 백천씨가 학창시절 소문에 대해 물은 것은 당연한 일. 지만씨는 답했단다. "그런 소문이야 알고 있었지. 그런데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어. 진짜."


#4 목격자 - 학도호국단에서 '서울의 봄'까지

58 개띠는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지켜본 '목격자 세대'이기도 하다. 물론 4.19 혁명(60년)과 5.16 군사 쿠데타(61년) 때는 걸음마나 뗐을 법한 나이. 그러나 철이 들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철권통치'를 몸소 체험해야 했다. 겨우 철이 들 무렵 130여 개의 단어로 이뤄진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워야 했고, 갓 개통한 경부고속도로변으로 대통령 '마중'도 나가야 했다. '학도호국단'이라는 이름으로 교련복을 입고 연병장 같은 운동장을 박박 기던 고등학교 때는 영부인이 피살되는 사건도 목도한다. 백천씨는 "세종로에서 영부인 운구차가 지나가는 장면을 봤다"며 "'대통령=박정희'라고 믿던 때라 그 영부인이 사망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어요. 눈물을 흘리는 아이도 많았죠"라고 회상한다.

58 개띠들이 대학문화의 주축이던 79년에는 그 '남편'까지 총탄에 쓰러졌다. 온 나라는 충격과 함께 혼란에 휩싸였고, 이들은 군사독재를 종식할 기회라며 거리로 뛰쳐나갔다. 78년 대학가요제를 통해 데뷔한 백천씨도 이 대열에 서야 했다. "그때 벌써 쇼 MC를 맡고 있었어요. 그래도 '데모'에는 참가했죠. 시위가 시작되기 전에 앞에 나가 '아침이슬' 같은 노래를 불렀어요. 그리고 시위가 시작되면 기타를 싸들고 방송국으로 갔죠. 참 고민이 많은 시기였어요."

개띠들의 마음 고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듬해 찾아왔던 짧은 '서울의 봄'. 그 뒤를 따라온 광주학살과 계엄령, 그리고 휴교령. 이런 순서를 밟아 기어코 탄생한 또 한 명의 '군인 대통령'. 어느 쪽으로 구르는지 모르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지켜보는 젊음은 괴로웠다.


#5 낀 세대 - 위에선 누르고 밑에선 치받고

"노동3권 보장하라! 보장하라!" "시끄럿! 노동3권이 뭔 줄이나 알아?" "……."

백천씨가 떠올리는 80년대 초반 경찰서 유치장의 풍경이다. 이렇게 당시 58 개띠 중엔 '학습'을 받지 못한 '운동권'이 많았다. 1학년 때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거리로 나선 '386세대'와 다른 점. 그렇다고 한.일협정 반대를 외치던 '이명박 세대'와도 달랐다. 민족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를 바라봤다는 점이 그렇다. 이렇게 58 개띠들은 커다란 선배와 강력한 후배 사이에 '낀 세대'였다.

당장 백천씨의 가수 인생만 해도 그렇다. 한대수.윤형주.송창식씨 등 1세대가 등장한 70년대 초반 포크는 가요계의 주류였다. 그러나 백천씨가 데뷔한 70년대 후반 이미 포크 음악은 밀려나고 있었다. 대신 이문세.변진섭씨 등의 '발라드'가 가요계를 휩쓸기 시작했다. 따라서 '포크 가수'로서 백천씨는 낀 세대다.

백천씨는 졸업 뒤 건축회사도 7년간 다녔다. 한국을 성장 궤도에 올려놓은 계기가 됐던 중동 특수 때 사우디아라비아에도 갔다. 하지만 일반적인 회사 생활에서도 58 개띠는 낀 세대였다. "우리가 과장 정도 되니까 컴퓨터란 물건이 나오더군요. 늘 이런 식이에요. 선배들은 '실력 없는 뺑뺑이 세대'로 취급하고, 후배들은 'PC 하나 못 다루는 퇴물'로 보죠."

마침 개띠가 갓 마흔을 넘던 98년 외환위기까지 한국을 강타했다. 당시 유행어는 '사오정(40~50대는 이미 정년)'. 이 유행어의 가장 어린 피해자가 바로 58 개띠였다. 백천씨는 말한다. "낀 세대로서 극심한 경쟁 속에 불행한 현대사까지 고스란히 체험한 게 우립니다. 바로 이런 점들이 58 개띠의 공통분모를 만든 게 아닐까요. 자기들끼리 잘 뭉치고, 살아남기 위해 늘 약간씩 튀려고 하는. 물론 그렇다고 선배들의 권위에 대놓고 도전도 못하지만…."


#6 선생님 - 아직'현역'인데 …

백천씨는 현재 MBC와 SBS-TV 프로그램을 맡고 있다. KBS에서도 라디오 DJ를 하고 있다. '방송 3사'를 꿰고 있는 것. 게다가 유니세프.환경부.서울시 등 수많은 단체의 홍보대사이기도 하다. 내년엔 15년 만에 새 앨범도 내볼까 생각 중. 물론 전문MC 김연주씨와의 사이에 1녀1남도 토실토실 잘 기르고 있다. 이만하면 누가 봐도 '현역'의 삶이다. 그런데 그의 귀에 요즘 자꾸 "선생님"이란 소리가 들린다. 어린 후배들이 존경심을 담는다고 부르는 호칭이다. 하지만 백천씨는 그 호칭이 불편하다. "아무리 편해도 '선생님'이 한 분 끼어 있으면 자리가 조심스러워지잖아요. 아직 젊은데 제가 벌써 그런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다니 섭섭합니다."

백천씨뿐이 아니다. 2006년을 코앞에 둔 이 시점에 58 개띠들은 어느 분야에서든 '관리자'라 불린다. 연예계로 따지면 '선생님'. 그러나 개띠들은 아직 그 호칭이 억울하다. 나이에 비해 파란만장한 경험을 했기에 후배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많다. 게다가 수만 많았지 한 번도 '주류'의 위치를 차지해 본 적도 없다. 그러니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여긴다. 이런 마당에 '예비역 취급'이 반가울 리 없다. 그래서 백천씨의 이런 마음이 58 개띠들에겐 남 얘기 같지 않을 것이다.

"저는 함께 일하는 이들에게 늘 '작은 오빠'라고 불러달라고 해요. 글쎄…아직은 딱 그 정도가 저한테 적당한 거 같아요. 아닌가요?(웃음)"


중앙일보 2005.12.29 15:24 입력 / 2005.12.30 06:3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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