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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동문CEO토크</title>
        <description>동문CEO토크</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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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stBuildDate>Wed, 15 Apr 2026 17:02:19 +0900</lastBuild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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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동문 CEO - (유)에이치서비스플랫폼 민태흥 대표를 만나다 / 행정학과 78학번</title>
            <link>1066118</link>
            <description>&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files-v2/c1.jpg?type=image&amp;amp;id=2bb5f9e6676ab95a7420ae785d366319&quot; style=&quot;max-width:10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유)에이치서비스플랫폼 민태흥 동문은 30년 넘게 하나은행에서 근무한 금융 전문가다.&amp;nbsp;민 동문은 오랜 기간 은행권에서 근무해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 로 2015년 9월 사업체를 설립했다. 업무 정보를 효율적으로 관리해 기존보다 더 빠르고 정확한 업무 처리 시스템을 제공하는 회사다. 폭넓은 금융 지식을 활용해 모교 겸임교수로도 활동 중인 민 동문을 만나 졸업 후 진로와 금융권 취업 준비, 직장생활 노하우 등에 관해 들어봤다.&lt;br /&gt;
&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strong&gt;작은 태도가 큰 전환점을 만든다&lt;/strong&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민태흥 동문은 대학 입학 당시 행정가를 꿈꿨다. 그는 행정학과에 입학하자마자 행정고시 준비를 시작했다. 학업과 고시 준비에 전념하다보니 그의 학교생활은 늘 분주하고 치열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저는 지극히 평범하고 약간은 소심한 학생이었습니다. 1학년 때부터 도서실에서 행정고시를 준비해서 그런지 캠퍼스의 낭만과는 좀 거리가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돌이켜보면 학교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죠.”&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하지만 4학년 진학을 앞두고 그는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고시 공부와 취업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더욱이 입대 문제까지 겹치면서 오랜 시간 한 길만 보고 달려온 그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3학년 말까지 고시공부를 하다 보니 합격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졌었어요. 졸업 이후에도 공부를 할 경제적 여건도 안 됐죠. 입대 시기까지 맞물리면서 대안을 찾아야 했어요. 당시 취업 준비를 하던 중 금융권의 경우 군 미필자도 취업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죠. 게다가 군복무 중에도 월급의 70%가 지급되는 것을 알고 서울신탁은행(현 KEB하나은행의 전신)에 지원하게 됐죠.”&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고시 합격을 향해 기울였던 3년여 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과 수석’이라는 성적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만 찾아온다’는 말처럼 과 수석 장학생이 되자, 그에게 멀게만 느껴졌던 ‘은행권 취업’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당시 은행권 입사 시험 과목 중 경영학은 저에게 생소한 분야였습니다. 그래서 4학년 때는 경영학 공부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죠. 경영학 원서 한 권을 거의 달달 외우다시피 한 결과, 서울신탁은행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죠.”&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files-v2/c2.jpg?type=image&amp;amp;id=ffd126355345b72b70862db422a7cfa1&quot; style=&quot;max-width:10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
&lt;strong&gt;불합리한 관행에 의문을 제기하다&lt;/strong&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1982년. 그가 사회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한 해다. 그는 사회 초년생 시절부터 성실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왔다. 성실에 대한 그의 정의는 일반적인 개념과 사뭇 달랐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성실이라는 가치관은 정말 폭 넓은 개념이죠.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저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보다 잘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 노력했던 꾸준함이 결국 성실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 신념은 세월이 흐르면서 저만의 장점이 됐죠.”&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그는 평사원 시절에도 업무 프로세스 개선에 관심을 기울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따랐던 관행에 대해 그는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더 나은 해답을 찾아 나섰다. 그 결과 업무 효율성은 물론, 실적도 향상되기 시작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불합리한 업무 프로세스가 있어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를 물으면 ‘과거부터 그렇게 해왔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적지 않았습니 다. 그런데 저는 바꿀 수 있다고 판단되면 주저하지 않고 프로세스 개선을 위해 업무 제안을 하곤 했죠. 그래서 우수 직원 표창도 많이 받았습니다. 또한 책임자 시절에는 외화대출 금융상품을 신규 제안해 판매액 1조원이라는 성과를 거둔 적도 있죠.”&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그의 제안으로 은행에 혁신을 가져온 사례도 있다. 그것은 바로 고객의 불만에 발 빠르게 대처하는 ‘민원사전보고제도’다. 이 제도의 핵심은 민원 접수 및 처리 절차를 줄여 고객의 불편을 최단 시간에 해소하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과거에는 고객이 지점에서 불만을 1차로 제기하고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금융감독원에 민원을 추가로 접수해야 했습니다. 금융감독원이 해당은행 본부에 민원을 전달해 그것이 해결되기까지 1개월 이상이 걸리는 구조였죠. 그래서 저는 지점에서 고객의 불만이 나오면, 본부에 바로 보고하게 하고, 이를 초기에 적극 해결토록 유도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제가 제안을 제도화한 결과, 고객의 민원이 신속히 해결되어 고객만족도가 상승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나은행이 2013, 2014년 소비자보호 최우수은행으로 선정된 바 있죠.”&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그는 하나은행 경영지원그룹장 및 HR본부장을 거쳐 하나캐피탈 경영 지원 및 영업지원그룹장을 역임했다. 그는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2015년 9월에는 그의 제안으로 에이치서비스플랫폼(이하 HSP)이라는 회사가 꾸려졌고, 현재 그는 HSP의 대표를 맡고 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하나캐피탈은 약 2만 2천대의 렌터카를 소유하고 있는데 이 사업에는 범칙금 통지나 소유자 변경 업무, 사고 발생 시 후속 조치 등 많은 후선 업무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업무를 전문적으로 하는 회사를 만들면 업무 효율성이 훨씬 높아질 거라고 판단했지요. 아직은 신생회사지만, 성장하는 기업이 되기 위해 전직원이 노력하고 있습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files-v2/c3.jpg?type=image&amp;amp;id=c49f8204b83c135c4af065e91785df5b&quot; style=&quot;max-width:10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
&lt;strong&gt;은행권에서 원하는 3가지 인재상&lt;/strong&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그는 은행에서 3년여 간 인사담당 임원을 맡아 관련 업무를 총괄한 적도 있다. 그는 응시자와 면접자들을 직접 심사했던 경험을 토대로 금융권 취업 당락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3가지 기준을 언급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은행권에 취업하려면 명문대 출신이어야 하고 성적도 아주 높아야 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현실과 다르다는 점을 꼭 얘기해주고 싶습니다. 금융권에서 바라는 인재상을 3가지 단어로 압축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진정성과 긍정적인 사고방식, 도덕성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정성이란 ‘경험한 것을 자신의 성장과 발전에 어떻게 연결시켰는지 진지하게 접근해보는 것’입니다. 또한 그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기회로 보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것이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죠. 마지막으로 도덕성은 취업 후에도 유지돼야 할 중요한 가치입니다. 금융권에서 일하려면 무엇보다 사익에 흔들리지 않는 높은 도덕성을 갖춰야 합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그는 모교에서 경영학 겸임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다. 그는 평소 사회 진출을 앞두고 있는 학생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제 인생이 증명하는 것처럼, 수업에 성실히 참여하는 작은 태도가 나중에 인생의 큰 전환점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수업 시간에도 종종 학생들에게 제 인생 경험담을 들려주면서 ‘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활태도가 중요한지’를 설명해주려고 하죠. 동문으로서 후배들을 향한 진심어린 조언은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그는 제2의 출발점에 섰다. 신생기업의 수장으로서 그는 모두가 함께 성장하는 기업을 희망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가 잘 되는 리더십’이 절실하다는 민태흥 대표. 그가 겸임교수로 활동하는 것도 ‘긍정의 리더십’을 더욱 확산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앞으로도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렘과 즐거움을 가지고 인생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열정적이고 긍정적인 삶의 태도가 그의 인생을 이끄는 듯했다.&lt;/p&gt;
</description>
            <author>박차현</author>
            <pubDate>Thu, 01 Jan 1970 09:00:00 +0900</pubDate>
        </item>
        <item>
            <title>동문 CEO - (주)이노시뮬레이션 조준희 대표를 만나다 / 기계공학과 86학번</title>
            <link>1066117</link>
            <description>&lt;p&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28, 0);&quot;&gt;&lt;strong&gt;‘세계 시뮬레이션 시장 선도할 것’&lt;br /&gt;
작은 실험실에서 시작된 대한민국 4차 산업혁명&lt;/strong&gt;&lt;/span&gt;&lt;/p&gt;

&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8/0105607/1.jpg&quot; style=&quot;max-width: 100%;&quot; /&gt;&lt;/p&gt;

&lt;p&gt;‘4차 산업혁명’이 최근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정보통신 기술이 오프라인 산업 현장과 결합하면서 일어난 혁신’을 일컫는 것이 4차 산업혁명이다. 이로 인해 과거 영화 속 이야기로만 여겨졌던 수많은 일들이 현실로 이뤄지고 있다. 급격한 변화를 거듭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선봉에서 국내 시뮬레이션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이노시뮬레이션의 행보를 조명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8/0105607/2.jpg&quot; style=&quot;max-width: 100%;&quot; /&gt;&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28, 0);&quot;&gt;&lt;strong&gt;국민대학교 한 실험실에서 시작된 도전&lt;/strong&gt;&lt;/span&gt;&lt;br /&gt;
㈜이노시뮬레이션은 대한민국 시뮬레이션 및 가상현실 분야의 1세대 기업으로 꼽힌다. 이 회사의 시작은 2000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제는 일반인들도 시뮬레이션, 가상현실 등 ‘4차 산업혁명’ 관련 기술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추고 있지만, ㈜이노시뮬레이션 창업 당시만 해도 이런 기술은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쉽게 말해 ㈜이노시뮬레이션은 지금까지 우리나라 그 누구도 밟지 않은 ‘미지의 땅’을 개척한 셈이다.&amp;nbsp;&lt;/p&gt;

&lt;p&gt;조준희 ㈜이노시뮬레이션 대표이사는 “회사를 창립했던 2000년 전·후만 하더라도 시뮬레이션이나 가상현실 등의 정보통신 융복합 분야에 대해서는 개념조차 생성되지 않았을 때였다”며 “국내 정보통신 융복합 분야의 선구자로 꼽히는 이운성 국민대학교 자동차공학과 교수를 비롯해 5명의 동료들이 모여 소위 ‘실험실 창업’으로 ㈜이노시뮬레이션을 시작했다”고 말했다.&amp;nbsp;&lt;/p&gt;

&lt;p&gt;학사부터 석사, 박사까지 전 과정을 국민대에서 마친 조 대표가 시뮬레이션을 처음 접한 것은 그가 석사과정을 밟고 있을 때였다. 대학교 졸업 후 ㈜만도기계에 입사한 조 대표는 회사의 교육 지원을 계기로 석사과정을 밟기로 했다. 마침 국민대학교 대학원 과정에 ‘자동차학과’가 새롭게 신설되기도 했다.&amp;nbsp;&lt;/p&gt;

&lt;p&gt;조 대표는 “어린 시절부터 비디오나 TV를 분해, 재조립하며 놀 정도로 기계에 관심이 많았다”며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직장을 선택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마침 모교에 자동차학과가 출범함에 따라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국민대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다”라고 말했다.&amp;nbsp;&lt;/p&gt;

&lt;p&gt;그 이유는 충실한 커리큘럼과 확고한 관련 교육시스템을 갖춘 모교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교에 대한 그의 확고한 믿음은 곧 증명됐다. 1996년 6월 무렵, 대학원 시절 국내 1위 자동차 기업이 그의 은사인 이운성 교수에게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 시뮬레이터 연구를 제안함에 따라 제자였던 조 대표 역시 해당 프로젝트팀에 참여하게 됐던 것이다. 조 대표는 이 연구를 통해 시뮬레이션 분야를 처음 알게 됐다. 당시 연구비는 약 3억 원으로, 지금 기준으로 수십억 원에 달하는 것이었다.&amp;nbsp;&lt;/p&gt;

&lt;p&gt;생애 처음으로 접한 시뮬레이션은 조 대표의 마음을 뺏기에 충분했다. 연구가 진행되는 2년 동안 조 대표는 연구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연구에 몰두했다. ‘연구 총괄매니저’를 맡았기에 기계, 전기, 영상, 음향, 프로그램 등 모든 시스템의 통합 과정을 일일이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시뮬레이션 분야 선도국인 미국 전역, 무려 20,000km를 차로 돌며 여러 기업들을 방문하기도 했다. 조 대표는 “당시 단 한 순간도 허투루 보낸 적이 없다”고 말했다.&lt;/p&gt;

&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8/0105607/3.jpg&quot; style=&quot;max-width: 100%;&quot; /&gt;&lt;/p&gt;

&lt;p&gt;“저 역시 처음 접하는 부분이 많았기에 동료들과 함께 하루하루 배워나가며 프로젝트를 완성해나갔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포기하고 싶을 만큼 많은 난관에 부딪혔지만 하나하나 해결해나갈 때마다 스스로 자부심이 생기더군요. 매일이 전쟁과 같았죠.”&amp;nbsp;&lt;/p&gt;

&lt;p&gt;2년 후, 조 대표와 연구팀은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 시뮬레이터 개발에 성공했다. 무엇보다 의뢰 기업의 만족도가 컸다. 당시의 성과 덕분에 현재까지 ㈜이노시뮬레이션은 해당 기업의 연구개발 협력업체로서 매년 다양한 관련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8/0105607/4.jpg&quot; style=&quot;max-width: 100%;&quot; /&gt;&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28, 0);&quot;&gt;&lt;strong&gt;누적 매출 1,000억 원 달성! 시뮬레이션 분야 ‘NO.1’&lt;/strong&gt;&lt;/span&gt;&lt;br /&gt;
창업 17년 차를 맞이한 ㈜이노시뮬레이션은 누적 매출 1,000억 원을 달성했다. 국내에서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시뮬레이터 시장을 향한 도전이 최고의 성적으로 돌아오고 있다.&amp;nbsp;&lt;/p&gt;

&lt;p&gt;“그동안 이 짙은 안개를 헤치며 나아가는 형태였다면 이제는 제법 밝은 도로로 나온 모양새라 할 수 있죠. 무엇보다 국내는 물론 오히려 해외시장에서 ㈜이노시뮬레이션의 기술력을 인정한다는 것에 더없이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amp;nbsp;&lt;/p&gt;

&lt;p&gt;㈜이노시뮬레이션의 매출은 국내(내수)와 국외(수출) 비율이 5:5 정도로 나뉜다. (*그림1 참고) ㈜이노시뮬레이션의 기술은 혁신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자동차 산업의 첨단기술 및 전기·전자 관련 시스템 개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또한, 이 회사는 자율주행 자동차의 첨단 차량시스템 종합적 평가 및 검증 도구인 ‘자동차 시뮬레이션 분야 종합 솔루션’을 보유한 국내 최고의 전문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다. 조 대표의 말에 따르면 ㈜이노시뮬레이션은 굳건한 국내 1위 선도 기업으로 인정받는 것은 물론 전 세계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amp;nbsp;&lt;/p&gt;

&lt;p&gt;“앞으로 우리의 일상은 물론 제조, 의료 및 국방 분야에서도 시뮬레이션 수요가 높아질 겁니다. ㈜이노시뮬레이션의 성장은 이제 걸음마 단계인 셈이죠.”&amp;nbsp;&lt;/p&gt;

&lt;p&gt;조 대표와 ㈜이노시뮬레이션의 역사는 ‘도전’이라는 말 한마디로 대신 할 수 있다. 성공 가능성은 고사하고 당장 내일의 회사 존립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시작해, 시뮬레이터 및 가상현실 분야에서 국내 1위의 선도 기업으로 우뚝 서는 데 성공한 것이다. ‘청년실업 100만 명’이라는 사상 최악의 실업난에 힘겨워하고 있을 후배들에게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사뭇 의미심장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8/0105607/5.jpg&quot; style=&quot;max-width: 100%;&quot; /&gt;&lt;/p&gt;

&lt;p&gt;“도전은 청춘만의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제 20~30대는 물론 ㈜이노시뮬레이션 창업부터 현재까지의 역사 모두 ‘도전’이란 한 단어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국민대학교 후배 여러분, 도전하십시오. 다만 한 가지, 무턱대고 ‘창업’이라 이름 붙여진 도전을 선택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요즘에는 많은 이들이 ‘청년창업’이란 이름으로 사업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100에 99, 혹은 그 이상이 실패로 끝납니다.&amp;nbsp;&lt;/p&gt;

&lt;p&gt;왜 그럴까요?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책상에서 배운 지식만으로 성공할 수 있다면 그 누구도 실패라는 쓰라린 경험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는 자신만이 갖고 있는 독자적인 기술력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자신만의 분야를 개발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선도해나갈 수 있는 역량을 키운다면, 손꼽히는 전문가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제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지만 앞으로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미지에 대한 도전과 탐험을 계속할 계획입니다.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갈 ‘준비된’ 청춘들의 도전을 기대해봅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28, 0);&quot;&gt;&lt;strong&gt;㈜이노시뮬레이션의 주요 개발 이력&lt;/strong&gt;&lt;/span&gt;&lt;/p&gt;

&lt;p&gt;&lt;strong&gt;■ 국내&lt;br /&gt;
① 차량&lt;/strong&gt;&amp;nbsp;&lt;br /&gt;
고성능 도로주행 시뮬레이터 / 건설기계 연구개발용 모션시뮬레이터&lt;br /&gt;
교통안전공단 운전적성검사 시뮬레이터&lt;/p&gt;

&lt;p&gt;&lt;strong&gt;② 철도&lt;/strong&gt;&lt;br /&gt;
KTX산천 PTS / SR(수서발 KTX) / KTX산천 시뮬레이터&lt;/p&gt;

&lt;p&gt;&lt;strong&gt;③ 국방&lt;/strong&gt;&lt;br /&gt;
해군 방수훈련시뮬레이터 / T-50 시뮬레이터(영상시현 부문)&lt;/p&gt;

&lt;p&gt;&lt;strong&gt;■ 국외&lt;br /&gt;
① 차량&amp;nbsp;&lt;/strong&gt;&lt;br /&gt;
중국 고속도로연구소 고성능 차량 시뮬레이터&lt;br /&gt;
중국 동남대 차량시뮬레이터&lt;br /&gt;
터키 전동차 시뮬레이터&amp;nbsp;&lt;/p&gt;

&lt;p&gt;&lt;strong&gt;② 철도&lt;/strong&gt;&lt;br /&gt;
인도 철도시뮬레이터&lt;/p&gt;
</description>
            <author>박차현</author>
            <pubDate>Thu, 01 Jan 1970 09:00:00 +0900</pubDate>
        </item>
        <item>
            <title>동문 CEO - 카루소 장광효 대표를 만나다 / 장식미술학과 76학번</title>
            <link>1066116</link>
            <description>&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6/0105213/01.jpg&quot; style=&quot;max-width:100%&quot; /&gt;&lt;/p&gt;

&lt;p&gt;다부진 몸에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상대를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 장광효 디자이너의 첫인상이다. 한없이 인자해 보이는 눈빛은 패션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언뜻 매서워진다. 전문가에게서 느낄 수 있는 냉철함이랄까? 그에게는 늘 대한민국 1호 남성복 디자이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남성복 패션에 있어서 그 발자취는 지금까지 왕성하게 이어지고 있다.&lt;/p&gt;

&lt;p&gt;크고 작은 부띠끄가 자리하고 있는 서울 강남의 청담동, 인근 압구정 로데오거리와 더불어 이 곳은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 패션의 중심지로 일컬어졌다. 그 중 장광효 디자이너의 브랜드 ‘카루소’ 는 꽤 오랜 기간 회자되어온 패션의 명품으로 손꼽힌다. 남성복의 개념이 대중화 되기 이전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장식미술학과를 졸업한 그는 대학원을 마친 후 파리로 떠났다. 향수병과 싸워가며 약 2년여, 파리 인근에 위치한 퐁텐 블루(FOUNTAIN BLUE) 예술학교를 졸업한 그는 귀국 후 캠브리지, 논노의 수석디자이너로 남성복 패션의 전성기를 일으켰다. 1987년 자신의 독자 브랜드 ‘카루소’를 론칭한 이후 그의 삶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을 기념해 국내 최초의 남성복 컬렉션을 개최했다. 이후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통해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혁신적인 패션을 선보였다. 국내 남성복 디자이너로서는 처음으로 파리 의상조합 정식 회원이 된 것도 그였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소방차’, ‘조용필’은 그의 단골 고객이었고, ‘소방차 바지’로 이름을 떨친 그의 히트작은 지금도 새로운 형태로 재해석 되며 젊은 트렌드셰터에게 선택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과거의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현재의 도전을 즐기고 있다. 과연 그의 삶을 성공으로 이끈 비결은 무엇일까?&lt;/p&gt;

&lt;p&gt;&lt;strong&gt;Q 얼마 전 있었던 ‘2015 K-모델 어워드’에서 오프닝쇼를 맡으신 것은 물론 디자이너상을 수상하셨습니다. 3월에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카루소 컬렉션도 진행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굉장히 바쁘셨을 듯한데요.&lt;/strong&gt;&lt;/p&gt;

&lt;p&gt;맞아요. 3월은 물론이고 5월만해도 컬렉션 때문에 정신 없었죠. 최근에는 대구텍스타일콤플렉스(DTC)라는 곳에서 이영희 한복디자이너, 이진윤 디자이너 등과 쇼를 했어요. 또 경기도에서는 니트 콜라보를 하기도 했고요. 경기도 양주는 우리나라 니트의 거의 대부분을 생산하고 있는 곳인데, 거기에 패션 빌리지가 만들어졌거든요. 제가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 부회장이다 보니 거기에서 나온 원단을 가지고 디자인을 한 쇼였죠. 또 경기도 내에 중고등학교 학생을 위한 교복 디자인도 맡게 됐어요. 경기도에서 생산한 원단을 가지고 교복을 디자인해 주니 일종의 재능기부를 하는 거라 할 수 있죠. 또 경찰 유니폼에 대해서도 컨설팅을 하고 있고요. 아마 곧 경찰 유니폼도 바뀔 거예요(웃음).&lt;/p&gt;

&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6/0105213/02.jpg&quot; style=&quot;max-width:100%&quot; /&gt;&lt;/p&gt;

&lt;p&gt;&lt;strong&gt;Q 1세대 남성복 디자이너이자 남성복 패션의 역사를 일궈오신 분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유독 남성복에 올인 하신 이유가 궁금하네요.&lt;/strong&gt;&lt;/p&gt;

&lt;p&gt;제가 디자이너로서 일을 시작할 때 여성복 업체하고 남성복 업체 채용에 모두 합격을 했어요. 반도패션(현 LG패션)과 캠브리지였죠. 고민이 되더군요. 그래서 은사이신 배천범 교수님께 상의를 드렸죠. 솔직히 남성복이 더 끌려서 “저는 남성복을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라고 여쭤봤어요(웃음). 다행히 교수님께서도 “여성복은 유명 디자이너가 많지만 남성복은 없니 네가 개척해서 1인자가 돼라”고 말씀해주시더라고요. 그때부터 쭉 남성복 디자이너로 살아오다 보니 지금까지 온 거죠.&lt;/p&gt;

&lt;p&gt;&lt;strong&gt;Q 그렇다고 해도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기는 쉽지 않을 듯 합니다. 어떤 노하우가 있으신가요?&lt;/strong&gt;&lt;/p&gt;

&lt;p&gt;발상의 전환이 필요해요. 디자이너라고 하면 겉보기에 멋있어 보이죠. 제가 쇼도 하고 TV에도 나오면 의상디자인학과 학생들은 동경을 하는 것이 사실이고요. 하지만 그 학생들에게 제가 하는 이야기는 좀 달라요. 패션디자이너가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죠. 또 경쟁이 꽤 치열하다는 것도 이야기 해요. 한 마디로 점점 더 힘들어지는 상황이라는 거예요. 요즘 저는 학생들에게 새로운 것을 해보라는 이야기를 종종 해요. 예를 들면 마네킹 같은 거죠. 최근에 DTC전시를 하다 보니 마네킹이 너무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쇼를 할 때 모델을 고르는 이유는 좋은 모델을 써야 옷이 돋보이기 때문인데, 마네킹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렇지만 제가 알기로 우리나라에는 제대로 된 마네킹 디자이너가 없어요. 그냥 유관 전공자들이 적당히 만들고 있는 거죠. 그렇다면 패션을 전공한 사람이 살짝 발상을 전환을 해서 디자인이 돋보이는 마네킹을 만들면 어떨까요? 우리나라, 일본, 중국 시장만 개척하면 전세계 시장이 열리는 거예요. 대단하지 않아요?&lt;/p&gt;

&lt;p&gt;&lt;strong&gt;Q 여러 히트작이 있으시지만, 그래도 장광효의 작품 중 성공한 것은 아마 지금도 회자되는 ‘소방차 바지’가 아닐까 합니다. 어떻게 탄생한 디자인인가요?&lt;/strong&gt;&lt;/p&gt;

&lt;p&gt;당시 고객 중에 승마국가대표가 있었는데 그분이 영국에서 승마복을 사왔는데 영 마음에 안 든다며 나한테 제작해 달라고 의뢰한 거예요. 전 승마복을 만들어 보지 않았던 터라 일단 사온 옷을 보자고 했죠. 원단과 패턴을 분석해보니 이걸 평상복으로 만들어 젊은이들에게 입히면 어떨까 싶더군요. 오늘 내가 입은 바지도 소방차바지 비슷한 거예요. 하렘팬츠, 일명 똥싼 바지라고도 하죠(웃음). 당시 소방차는 지금 엑소에 버금가는 인기가 있었죠. 일주일이면 소방차 무대 의상을 10벌 정도씩 해줄 때여서 마침 그 바지를 입혀봤는데 그게 히트를 친 거예요. 전국에서 소방차바지를 찾는데 한창 때는 하루에 1,000장 이상 나갔어요. 그때는 주 고객이 소방차와 조용필 씨였던 거고 그 외 다른 연예인들 옷도 거의 다 만들었어요. 당시에는 스타일리스트가 없던 때였으니 디자이너가 그 역할을 대신했죠.&lt;/p&gt;

&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6/0105213/03.jpg&quot; style=&quot;max-width:100%&quot; /&gt;&lt;/p&gt;

&lt;p&gt;&lt;strong&gt;Q ‘장광효 패션’을 이야기하자면 ‘카루소’를 빼 놓을 수 없는데요. 카루소가 탄생하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lt;/strong&gt;&lt;/p&gt;

&lt;p&gt;마지막 직장이었던 논노가 부도가 났어요. 그리고 나니 다른 회사를 들어가기보다는 회사를 차리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시 은행에 모아둔 예금으로 차린 것이 카루소였어요. 압구정동 갤러리아 백화점 앞에 숍을 차렸는데, 독특한 패션이라고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더군요(웃음). 당시만 해도 옷에 관심이 많던 시대였으니까요. 지금은 옷보다는 액세서리나 몸을 가꾸는 것이 유행이지만, 그땐 그랬어요. 또 요즘 패션은 과도한 멋을 부리지 않고 심플하게 신경 안 쓰는 듯 입는 게 멋쟁이 소리를 듣잖아요. 예전과는 많이 다르죠.&lt;/p&gt;

&lt;p&gt;&lt;strong&gt;Q ‘카루소’라는 이름은 이탈리아의 테너 엔리코 카루소의 이름이기도 하고, 그의 생을 노래한 곡의 제목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이를 브랜드 명으로 짓게 된 이유가 문득 궁금하네요.&lt;/strong&gt;&lt;/p&gt;

&lt;p&gt;제가 캠브리지를 다닐 때 결혼을 했어요. 아내가 음대 교수(성악가 길애령 씨)이기도 했고, 당시에는 음악 용어에서 브랜드네이밍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어요. 아내에게 남성복 브랜드 명으로 발음이 정확한 단어가 없는지 자문을 구했더니 카루소를 이야기하더군요. 엔리코 카루소의 이름에서 따온 게 맞아요(웃음). 듣는 순간 좋은 느낌이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채택했죠. 아내는 지금도 자기가 이름을 지었다고 종종 자랑을 해요(웃음).&lt;/p&gt;

&lt;p&gt;&lt;strong&gt;Q 사업적인 측면에서 선생님 역시도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을 듯 합니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 그리고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말씀해주신다면?&lt;/strong&gt;&lt;/p&gt;

&lt;p&gt;잘될 때는 안될 때를 염두에 두어야 해요. 특히 정상급의 연예인, 사업가, 아티스트들은 더욱 그렇죠. 한창 때 카루소 매장이 38곳이었던 시절도 있었어요. 본점 빼고 매출만 500억원이 넘었으니 엄청난 성공이었죠. 하지만 저는 사업가는 아니었어요. 계산에 약했던 셈인데, 중간에 이리저리 돈이 빠져나가는 걸 몰랐던 거죠. 그때 난 서울 컬렉션, 파리 컬렉션을 연이어 하고 전국 각지로 특강을 다니느라 너무 정신이 없었어요. 그 사이 관리가 안됐던 거죠. 결국은 한날 한시에 모든 매장을 철수하고 사업을 정리했어요. 그런데 6개월 있다가 IMF사태가 터진 거죠. 그때 내 손에 없는 돈은 내 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나 개인으로서 사업을 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죠. 그리고 전략을 바꿨어요. 바로 ‘디자인으로 승부하는 것’이었어요. 디자이너 장광효의 가치를 높이는 방법, 그게 홈쇼핑이었어요.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당시에 ‘안녕, 프란체스카’에 출연하게 되면서 대중적으로도 장광효라는 이름을 알리게 됐고요. 하지만 그 역시도 언젠가부터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제는 나보다는 후배들을 위해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은퇴를 하더라도 이어질 수 있는 좋은 일, 이를테면 장학재단을 통한 인재양성 같은 거죠.&lt;/p&gt;

&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6/0105213/04.jpg&quot; style=&quot;max-width:100%&quot; /&gt;&lt;/p&gt;

&lt;p&gt;&lt;strong&gt;Q 10년째 쿨가이 선발대회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계십니다. 차승원 씨를 비롯해 유지태, 현빈 씨 등을 런웨이 모델로 캐스팅하며 데뷔시킨 안목도 있으시다고 알고 있고요. 멋있는 사람의 조건은 무엇일까요?&lt;/strong&gt;&lt;/p&gt;

&lt;p&gt;젊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용기, 도전정신, 실험정신이 중요하죠. 저도 나이를 먹으니 어쩔 수 없이 안전지향적이 되긴 하지만, 젊은 친구들을 보면 다시 욕심이 생기기도 해요(웃음). 쿨가이 선발대회는 말 그대로 멋진 남자를 뽑는 콘테스트에요. 하지만 단지 잘생기기만 해서는 안 되요. 신체적인 건강함도 뒤 따라야죠. 사회에서 성공을 하려면 공부만 잘한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에요. 사람들은 누구나 매력 있는 사람과 일하고 싶어하거든요. 실제로 크리에이티브한 분야에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모두 저마다의 매력을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이 역시 실력이 없으면 안되죠. 실력이 없는 매력은 허당이거든요. 진정 멋진 사람이 되려면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이고 자기계발과 함께 운동도 병행해야 해요. 또 편협한 생각을 떨쳐내야 하죠. 젊은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자아가 강한 친구가 있어요. ‘난 이것은 싫다’고 이야기하는데, 주관이 뚜렷하다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못나고 못하니까 싫어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요. 부자들이 향유하는 것, 잘난 사람들이 멋 내는 것을 싫다고 하지만 사실 사람들은 동경 하거든요. 정말 똑똑한 것은 싫어하는 것을 잘 하는 거죠. 조건에 짓눌리지 않았으면 해요. 집이 가난하고 스펙이 없고, 외모가 떨어지고…, 그런 생각은 한없어요. 세상에 의외로 똑똑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노력하고 실력과 매너를 갖추면 멋있는 사람이 될 수 있어요.&lt;/p&gt;

&lt;p&gt;&lt;strong&gt;Q 오래 전 젊은 ‘쿨가이’ 장광효라는 사람이 어떻게 패션 디자이너로서 꿈은 키우게 됐는지 궁금하네요.&lt;/strong&gt;&lt;/p&gt;

&lt;p&gt;내가 고교시절만 해도 남자가 디자이너가 되는 건 상상을 하지 못했어요. 그저 무식하니 용감하다고 막무가내로 원하는 것을 찾았던 거죠. 처음에는 서울대 미대 시험에서 떨어져 크게 낙담을 했어요. 그리고는 붓을 다 버렸죠. 상심이 그 정도였어요. 그렇게 궁상을 떨고 있는데, 같은 독서실 친구였던 손석희(JTBC 보도부문 사장, 국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76 동문)가 “국민대학교도 좋은 대학이니 같이 도전하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석희는 국어국문학과, 저는 조형대학에 합격했고 학교도 같이 다녔죠. 돌이켜 보면 젊은 시기에는 친구도 참 중요한 것 같아요. 난 다행히 좋은 친구를 만났죠(웃음).&lt;/p&gt;

&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6/0105213/05.jpg&quot; style=&quot;max-width: 100%;&quot; /&gt;&lt;/p&gt;

&lt;p&gt;&lt;strong&gt;Q 선생님께서는 장식미술학과를 졸업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의상디자인학과 공부는 어떻게 하신 건지 궁금하네요.&lt;/strong&gt;&lt;/p&gt;

&lt;p&gt;그때 국민대 의상디자인학과는 남자를 뽑지 않았어요. 그래서 학장님을 찾아갔죠. 제가 알기로 해외 유명 아티스트, 디자이너, 요리사는 다 남자니 남학생을 뽑아달라고 부탁 드렸어요. 공대에 여자가 없는 것도 이상하니 여자 공대생도 뽑아야 한다고 했고요(웃음). 일단 알겠다고 하셨고, 난 그 이후로도 학교를 다니며 계속 건의했어요. 결국 제가 3학년 때 의상학과가 남자를 선발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장식미술학과(현 시각디자인학과)를 들어가서 부전공으로 의상디자인을 했고, 결과적으로 전공보다 더 성공하게 된 거죠.&lt;/p&gt;

&lt;p&gt;&lt;strong&gt;Q 손석희 앵커와의 기억을 더 말씀해 주신다면? 지금도 친분을 유지하고 계신다고 들었는데요?&lt;/strong&gt;&lt;/p&gt;

&lt;p&gt;석희는 대학 다닐 때 구두 하나, 가방 하나로 버티고 졸업했어요. 겨울에는 재킷하고 진회색 바지, 여름에는 재킷을 벗고 와이셔츠에 소매를 걷은 패션이었죠. 근데 참 담백했어요. 좋은 친구였고 향기가 있는 사람이었죠. 분야도 틀리고 전공도 다르지만 서로 어려울 때 만나서 그랬는지, 지금까지 인연이 이어지네요. 요즘에 만나도 ‘내가 네 친구라는 걸 사람들이 다 아는데, 멋진 옷 하나 만들어 줄 테니 입으라’고하면 싫다며 손사래를 쳐요(웃음). 아나운서 시절에도 다른 사람과 달리 그 친구는 메이크업도 안 해요. 피부가 좋아, 수려했죠. 우리 둘이 똑같이 동안이었는데, 지금은 석희가 더 늙었죠(웃음). 나도 대학 다닐 때는 멋있었어요.&lt;/p&gt;

&lt;p&gt;Q 선생님의 학창시절 모습이 궁금합니다. 꽤나 멋쟁이였을 듯 한데요.&lt;/p&gt;

&lt;p&gt;광교에 옷을 맞추는 단골집이 있었어요. 잡지 같은 걸 오려서 디자인을 바꿔서 만들어 달라고 해서 종종 맞춰서 입기도 했죠. 또 동대문에 가면 미군들 군용제품 파는 곳에서 군복을 염색해 입기도 하고요. 요즘은 밀리터리룩이라고 해서 군복을 그냥 입기도 하지만, 예전에는 안됐거든요. 그래서 영화 ‘닥터지바고’에 나오는 이끼 낀 녹색, 혹은 요즘 유행하는 버건디 컬러로 염색해 입고 다녔죠. 전령가방을 염색해서 도구, 옷감 같은 것도 넣고 다니고, 빈티지로 나름 멋 부려 입고 다니고 그랬죠.&lt;/p&gt;

&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6/0105213/06.jpg&quot; style=&quot;max-width:100%&quot; /&gt;&lt;/p&gt;

&lt;p&gt;&lt;strong&gt;Q 선생님께 가장 큰 영향을 주신 교수님이나 수업이 있다면? 그 이유는?&lt;/strong&gt;&lt;/p&gt;

&lt;p&gt;앞서 얘기한 배천범 교수님께서도 좋은 말씀을 해 주셨지만, 그 시절 제 꿈을 크게 만들어 주신 분은 당시 조형대학 학장을 하셨던 김수근 교수님이셨어요. 조형론 수업을 그분께 들었는데, 내가 남자인데도 정말 멋지게 느껴지는 분이셨어요. 한번은 교수님이 수업 중에 제게 “넌 목표가 뭐냐”라고 하셔서 “사실 전 목표가 없다, 적당히 살려고 한다”고 했더니 꿈을 가지라고 하시더라고요. 디자인을 전공했으니 부모님께 책 사본다는 구실로라도 돈을 타서 서울에서 제일 멋진 커피숍, 레스토랑을 가보라는 말씀도 해주셨어요. 가난하다고 빵집, 중국집만 다니고 좋은 것, 멋진 것을 보지 않고 꾸는 꿈은 허황이라고 하시더군요. 진짜 교수님이 일러 주신 대로 한번 해봤죠. 정말 다르더군요. 대학교 자판기 커피 맛과 호텔 커피 맛이 달랐고, 거기 오는 사람들의 패션, 선글라스, 구두…, 모든 것이 달랐어요. 그렇게 보고 다시 책을 보니 읽기만 해도 쏙쏙 들어왔어요. 그렇게 꿈을 키웠죠. 김수근 교수님뿐 아니라 조형대 교수님들이 그때 최고의 분들이셨어요. 우리나라 최고의 실력을 갖춘 교수님들이었죠. 그래서 제가 감히 1류가 됐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좋은 교수 밑에 좋은 제자가 나오는 거죠(웃음).&lt;/p&gt;

&lt;p&gt;&lt;strong&gt;Q 파리 퐁텐 블루(FOUNTAIN BLUE) 예술학교 유학시절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어떤 목표를 가지고 떠난 유학이었는지,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lt;/strong&gt;&lt;/p&gt;

&lt;p&gt;군대를 다녀와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외국을 경험해보고 싶었어요. 당시 유럽에서 최고로 치던 학교가 파리에 국립장식미술학교였는데, 시험에 합격하게 됐죠. 그런데 한두 달 지나니 매일 눈물이 나는 거예요. 향수병에 걸린 거죠(웃음). 보다 못한 교수님께서 여기서 괜히 힘들어하지 말고 자기가 학장으로 있는 파리 인근의 퐁텐 블루(FOUNTAIN BLUE) 예술학교로 가자고 하시더군요. 학위가 나오는 실기위주 학교였어요. 거기가 너무 좋았죠. 인근에 바르비종이라고 밀레가 만종을 그린 동네도 있었어요. 아침이면 자전거를 타고 나와 밀레 생가를 한 바퀴 돌고 오곤 했죠. 그렇게 2년 정도 공부를 했죠.&lt;/p&gt;

&lt;p&gt;&lt;strong&gt;Q 끝으로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으신 메시지가 있다면?&lt;/strong&gt;&lt;/p&gt;

&lt;p&gt;세상은 다 살만해요. 어떻게 마음을 먹고 즐겁게 일하느냐가 성공을 좌우해요. 꼭 돈을 많이 벌어야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유명해진다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에요. 인생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시간을 줘요. 기왕이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뭔가 이루는 게 낫지 않겠어요? 자기가 전공한 걸 최대로 살리고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면 성공하고 돈과 명예가 따라온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조금 아쉬운 것은 젊은 세대들이 지레 겁을 먹는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물론 어려움은 있어요. 공부하고 직장을 얻고, 돈을 버는 것이 쉽지는 않죠. 저도 돌이켜 생각하면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싶어요. 하지만 돈은 쫓으면 도망가더군요. 대신 일이 좋아 재미있게 하다 보면 돈을 벌게 되고요. 앞에서 이야기했듯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열정을 가지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성공은 자연스레 따라오게 돼 있어요. 좋아하는 기준이 되지 않고 고생 안하고 적당히 돈 벌 수 있는 일, 남을 배려하지 않고 편협한 삶을 추구한다면 아무리 공부를 하고 스펙을 쌓아봐야 허사에요.&lt;/p&gt;

&lt;p style=&quot;text-align: right;&quot;&gt;&lt;strong&gt;장광효&lt;br /&gt;
카루소 대표&lt;/strong&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right;&quot;&gt;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 부회장&lt;br /&gt;
쿨가이 선발대회 10년 연속 심사위원&lt;br /&gt;
제 10회 서울패션위크 헌정디자이너 10인 선정&lt;br /&gt;
삼성 캠브리지 수석디자이너(전)&lt;br /&gt;
논노 수석디자이너(전)&lt;/p&gt;
</description>
            <author>박차현</author>
            <pubDate>Thu, 01 Jan 1970 09:00:00 +0900</pubDate>
        </item>
        <item>
            <title>동문 CEO - OBS 윤정식 사장을 만나다 / 정치외교학과 76학번</title>
            <link>1066115</link>
            <description>&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5/0105142/img_1_01.jpg&quot; style=&quot;max-width: 100%;&quot; /&gt;&lt;/p&gt;

&lt;p&gt;기술이 발달하고 새로운 미디어 서비스가 등장하며 우리나라 방송환경은 눈부시게 발전해 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SNS의 등장과 온라인 저널리즘의 세력 확장으로 기존 매스미디어의 입지는 점차 좁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천과 수도권을 기반으로 한 지역 지상파 방송사인 OBS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지난 2007년 개국이래 색다른 방송 콘텐츠를 선보이며 새로운 시도를 거듭했다. 하지만 법적인 제약으로 인천 외 지역의 ‘역외 재전송’이 불가능해 충분한 시청자를 확보하지 못한 채 시도한, 순서가 맞지 않는 이른 도전이었다. 그 후 OBS는 경영상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상황은 윤정식 사장이 취임한 지난해 7월 까지도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국민대학교 정치외교학과 76학번 동문이기도 한 윤정식 사장은 취임 직후 OBS의 경영 정상화를 목표로 세웠다. 방송기자로서 오랜 경력과 경영자로서 쌓아온 경험들이 십분 발휘됐다. 반년 남짓의 짧은 시간 그가 이뤄낸 성과는 놀라웠다. 만성적인 경영난에 시달리던 OBS를 창사 이래 처음으로 흑자로 돌아서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2016년 OBS의 출발은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차다. 과거와 달리 여건도 나쁘지 않다. 법적인 제약이 해결되며 서울과 경기 권까지 약 2,600만명의 시청자를 확보한 상황이다. 이런저런 사항들을 챙기느라 인터뷰 중에도 수시로 업무를 봐야 하는 윤정식 사장의 표정에는 자신감과 함께 무거운 책임감이 엿보였다. 그가 이야기하는 학창시절, 그리고 젊은 날의 에피소드 속에는 ‘노력’이라는 두 글자가 각인돼 있었다. 그러면서도 저성장과 취업난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꿈을 이뤄가고 있는 국민대학교 후배들을 이야기할 때면 안타까움을 털어놓기도 했다.&lt;br /&gt;
&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OBS는 지난 2007년 개국이래 지역 지상파 방송국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헤쳐나오며 기반을 다져왔다고 알고 있습니다. 지난 2015년 7월 취임 후 굉장히 바쁘셨을 듯 한데요. 취임 당시 어떤 목표를 세우셨는지 궁금합니다.&lt;/strong&gt;&lt;/p&gt;

&lt;p&gt;OBS가 지상파 방송사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는 계기를 만들어야겠다는 것을 목표로 세웠죠. 최근까지 OBS는 원칙이 없었다고 생각해요. 경기도와 인천을 근거로 하는 방송사로 허가를 받았는데 시작부터 전국 방송, 즉 중앙방송의 방식으로 운영이 된 거죠. 이미 몇 십 년의 역사를 가진 다른 지상파 방송사를 따라잡기란 쉽지 않거든요. 게다가 역외 재전송 규제가 있는 상황에서 방송 콘텐츠만 의욕적으로 많은 제작비를 들여 만들기도 했고요. 그 모든 게 누적이 돼서 어려움으로 이어졌던 거죠. 이러한 상황에서 제가 사장으로 취임해 할 일은 우선 ‘경영 정상화’ 였어요. 그 이후에 올바른 방송 콘텐츠, 좋은 방송 콘텐츠를 만들어서 인천은 물론 경기, 서울 지역 2,600만명의 시청자를 대상으로 인지도를 높여야 된다는 생각을 했죠.&lt;/p&gt;

&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5/0105142/img_1_02.jpg&quot; style=&quot;max-width: 100%;&quot; /&gt;&lt;/p&gt;

&lt;p&gt;&lt;br /&gt;
&lt;strong&gt;Q 취임하신 후인 지난해 12월 말 OBS는 ‘백령 DTV 방송보조국’을 개국했습니다. 중국의 온주미디어그룹과 콘텐츠 교류MOU도 체결했다고 알고 있고요. 2016년 OBS의 계획은 무엇인가요?&lt;/strong&gt;&lt;/p&gt;

&lt;p&gt;지난해 말 OBS는 창사이래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그걸 기반으로 해서 올해는 경영을 호전시키고 수익도 늘려서, 좋은 방송 콘텐츠에 투자할 만한 여력을 키울 예정입니다. 그래야만 정상적인 지상파 방송사로서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있거든요. 만만치 않은 목표지만, 그것의 50%를 이뤄도 목표 없이 운영 됐던 기존의 OBS보다는 훨씬 나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 이상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죠.&lt;/p&gt;

&lt;p&gt;&lt;strong&gt;Q 충암고등학교를 졸업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고교시절 사장님께서는 어떤 학생이셨는지, 또 어떤 꿈을 키우셨는지 궁금합니다.&lt;/strong&gt;&lt;/p&gt;

&lt;p&gt;충암고가 바둑으로 유명했거든요. 저 역시 바둑을 좋아하고 야구도 좋아했죠. 그 시절은 다른 친구들처럼 천방지축으로 돌아 다녔어요(웃음).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나는 좀 특별한 일을 할 것 같다’는 막연한 예감은 했어요. 부모님의 가르침 덕분에 책을 많이 본 편이었고 영화나 연극을 통해 다양한 문화를 접하는 걸 좋아했죠. 아버님 회사에 가서 아르바이트도 해보고요. 특히 방학 때는 어린 나이에도 ‘내가 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는 다양한 경험을 해보자’는 생각에 일단 부딪혀보며 살았던 것 같아요.&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5/0105142/img_1_03.jpg&quot; style=&quot;max-width: 100%;&quot; /&gt;&lt;/p&gt;

&lt;p&gt;&lt;strong&gt;Q 부모님 말씀을 하셨는데, 기억에 남는 가르침이 있으셨나요?&lt;/strong&gt;&lt;/p&gt;

&lt;p&gt;부모님께는 정말 고마운 것이 있어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에 한글 전용운동이 시작됐어요. 하지만 아버님은 우리나라 언어는 한자를 모르고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당시 일간지 사회면을 모두 뒤져서 한자가 나오면 훈음을 다는 훈련을 시키셨죠. 1주일에 신문을 나오는 날이 6일이었는데 그 나이에는 꽤 많은 양이었어요. 어린 마음에 너무 하기 싫어 한번 정도는 게으름을 피우기도 했죠. 그때는 그렇게 싫었는데, 지금에 와서 저는 우리 세대 중에서도 한문을 굉장히 많이 아는 사람이 됐어요. 제가 어린 시절에 부모님께서 엄격하신 덕분이었죠. 그것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부모가 엄격하면 그 엄격함을 따라서 자식은 맞추려고 노력하거든요. 당장은 힘들고 어렵겠지만, 나중에 보면 정말 옳은 일이 되니까요. 한편으로 우리 아버지께서도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린 아들이 힘들어 하는데 시키는 게 쉽진 않거든요(웃음). 그래서 전 지금도 부모님께 감사하다고 말씀 드려요.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 하셨고, 책 읽는 습관도 키워주셨죠. 굉장히 좋은 교육이 됐다고 생각해요.&lt;/p&gt;

&lt;p&gt;&lt;strong&gt;Q 국민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lt;/strong&gt;&lt;/p&gt;

&lt;p&gt;방금 말씀 드렸듯, 그 역시도 아버님께서 시키신 신문 한자 훈음 달기 연습이 적잖이 영향을 줬다고 생각해요. 어릴 때부터 매일 빼놓지 않고 신문을 읽다 보니 법이나 행정, 정치에 대해서 일찍부터 관심이 많아졌거든요. 재수를 하면서도 저는 계속 정치, 행정 분야의 학과로 지원을 했어요. 그만큼 사회학에 관심이 높았죠. 어떤 사회적 현상이 나타나면 분석 하는 것을 좋아했고, 그때는 나름 특별한 해석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웃음).&lt;/p&gt;

&lt;p&gt;&lt;strong&gt;Q 사장님께서 학교를 다니실 당시와 지금의 국민대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기억나시는 학교의 특별한 공간은 어디인지 궁금합니다.&lt;/strong&gt;&lt;/p&gt;

&lt;p&gt;제가 학교를 다닐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상전벽해라고 표현할 수 있어요. 총장님께서 계시는 본관은 그때도 있었어요. 그리고 신관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2호관이라고 하던가요? 그 뒤의 도서관도 기억이 나요. 특히 신관 뒤에 막사 형태로 ‘미네르바’라는 커피숍이 있었는데, 거의 매일 그곳을 들렀죠. 가장 기억에 남는 공간은 역시 도서관이에요. 집이 학교와 가까워 매일 새벽 6시면 도서관에 가 친구들 자리도 맡아 놓고 공부를 했거든요. 정말 지금의 제 뿌리를 키워 준 장소가 도서관인 듯 싶어요.&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5/0105142/img_1_04.jpg&quot; style=&quot;max-width: 100%;&quot; /&gt;&lt;/p&gt;

&lt;p&gt;&lt;br /&gt;
&lt;strong&gt;Q 대학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이 있다면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요?&lt;/strong&gt;&lt;/p&gt;

&lt;p&gt;1976년 학교에 입학한 새내기 시절에 정외과 축구팀에 들어가 10월 축제 축구대회에 참가했던 것이 생각나요. 그때 제가 골키퍼를 했는데 방어율이 꽤 높았어요. 문제는 결승에서 다이빙 캐치를 하다가 골대에 얼굴을 심하게 부딪혔다는 거죠. 그래서 앞니가 부러졌는데, 정외과 선배들이 돈을 모아서 치료해줬죠. 지금 제 앞니가 그때 치료받은 겁니다(웃음). 그 후에 군대에 다녀와서 복학 후 3학년 무렵에 다시 과 대항 축구대회가 있었는데, 그때는 제가 나름 리더십을 발휘했던 것이 기억나요. 결승전에서 상대팀과 전 후반 동점으로 연장전을 치렀는데, 전반전에 2골을 먹고 말았어요. 후반전이 시작되기 전 팀원들을 모아 놓고 “이건 아마추어 경기다. 우리가 여기서 포기하면 끝난다. 하지만 상대팀도 지쳤으니 마지막 10분은 죽을 힘을 내보자”고 했죠.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자고 한 이야기가 힘이 됐는지, 기적적으로 연장전 후반 10분에 내리 3골을 넣으며 우리 과가 역전 우승을 하게 됐어요. 그때가 참 기억에 남죠.&lt;/p&gt;

&lt;p&gt;&lt;strong&gt;Q 학과 내에서도 전공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중에도 기억에 남는 것이 있을 텐데요?&lt;/strong&gt;&lt;/p&gt;

&lt;p&gt;3학년 때 제가 기획하고 연출해서 최초로 진행했던 ‘모의 유엔총회’가 생각나네요. 1981년이었는데, 그 전까지는 이렇다 할 학과 이벤트가 없었죠. 당시 강당이 101호와 102호 강당 2곳이었는데, 법학과의 ‘모의재판’이 인기가 좋았어요. 마침 101호 강당이 법학과 모의재판 할 때 비어있다는 걸 알고는 같은 날 모의 유엔총회를 하기로 했죠. 한달 이상 합숙을 하며 인사말은 영어로 하고 프랑스 대표는 불어로, 일본 대표는 일본어로 연습을 시키며 준비했던 거라 꽤 그럴 듯했죠. 그런데 놀라운 것이 법학과의 모의재판을 보러 간 학생들까지 저희 쪽으로 몰리며 대박을 쳤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좌석의 3분의 1 정도 차있더니 끝날 무렵에는 자리가 없을 정도였죠. 그 후로 모의 유엔총회는 5년 정도 이어졌다고 알고 있어요. 중단 된 것이 안타까운데, 지금 정치외교학과 학생들도 한 번 해 볼만한 행사가 아닐까 싶네요.&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5/0105142/img_1_05.jpg&quot; style=&quot;max-width: 100%;&quot; /&gt;&lt;/p&gt;

&lt;p&gt;&lt;br /&gt;
&lt;strong&gt;Q 졸업을 앞두고는 장래에 대한 고민이 컸을 듯 합니다. 어떤 목표를 세우셨나요?&lt;/strong&gt;&lt;/p&gt;

&lt;p&gt;그때 역시 지금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취직 걱정이 컸어요. 물론 지금보다 취업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죠. 대기업 등 욕심을 내볼만할 여건이 됐고, 경쟁도 지금보다 치열하지 않아 열심히 하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거든요. 하지만 제 경우는 좀 달랐어요. 당시 우리학교 학생들이 많이 도전하지 않았던 언론사에 도전 했거든요. 대학교 4학년 1학기인 3월부터 언론사 시험을 계속 봤어요. 한국일보, 중앙일보와 같은 신문사부터 KBS, MBC 등 방송사도 지원을 했죠. 결국 마지막에 춘천 MBC에 합격을 했어요. 언론사 기자는 당시 제 간절한 희망이었는데 가까스로 이뤄낸 거죠. 당시 학생들은 보통 8월이면 대부분 취직이 됐고 제 경우 졸업준비위원회 활동도 한데다가 성적도 좋았기 때문에 더 빨리 취직할 수 있었어요. 오죽하면 학과장님께서 “왜 굳이 언론사를 고집하냐”고 하실 정도였죠. 그래도 끝까지 언론사 시험을 봤어요. 결국은 응원해 주시고, 동기들도 할 수 있다고 응원해 줬죠. 그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거기서 많은 용기를 얻었거든요.&lt;/p&gt;

&lt;p&gt;&lt;strong&gt;Q 방송 기자 생활을 하시다가 미국 휴스턴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시 이야기를 들려 주신다면 ?&lt;/strong&gt;&lt;/p&gt;

&lt;p&gt;처음 춘천 MBC 기자로 시작했지만, 목표는 서울의 MBC 본사였어요.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각 지방 MBC는 독립법인이라 서울 MBC로 올 수는 없었죠. 방법도 모르고 끌어줄 인맥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포기 할 순 없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서울 MBC로 갈 수 있을까”를 궁리했죠. 결국은 실력이었어요. 실력 있는 기자라면 스카우트를 할 거라고 예상했죠. 춘천 MBC에 있으면서도 전국에 방송될 만한 기사거리를 찾아 발로 뛰었어요. 그리고 당시 ‘MBC 가이드’라는 잡지에 취재 후기나 기고를 하면서 서울 MBC에 제 인지도를 높이는 노력을 했죠(웃음). 또 영어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했어요. 어떻게든 남들과는 다른 실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죠. 결국은 미국 대학원에 갈 수 있는 수준을 달성해서 서울언론재단의 해외 연수 프로그램에 지원을 했어요. 석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2년 과정이었는데, 당시에는 그 프로그램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기자가 별로 없었어요. 제가 살펴보니 충분히 가능하겠다 싶어서 도전을 했죠. 당시 심사를 하시는 분들이 언론계에 명성이 자자한 분들이었는데, 처음에는 제가 지방 방송사 출신 기자라는 것을 썩 반기지 않았어요. 하지만 준비한 학업계획서와 영어성적을 보고는 눈빛이 달라지더군요. “이미 어드미션까지 받아놨으니 지원만 해주시면 된다”고 하니 바로 통과시켜 주시더군요. 그렇게 휴스턴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어요. 결국 과정을 마칠 때쯤 서울 MBC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어요. 그렇게 1989년에 춘천 MBC에 양해를 구하고 퇴사한 뒤 서울 MBC에 경력기자로 입사를 했어요. 저 이후로 지방 MBC 출신들이 서울 MBC에 경력기자로 입사하는 사례가 많아지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보면 선례가 됐다는 점에서 자부심이 있죠.&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5/0105142/img_1_06.jpg&quot; style=&quot;max-width: 100%;&quot; /&gt;&lt;/p&gt;

&lt;p&gt;&lt;br /&gt;
&lt;strong&gt;Q 1990년대는 사회 전반에 큰 사건 사고가 많았던 시기인데요. 당시 방송기자로서 사장님께서 기억하시는 중요한 몇 장면을 꼽으신다면?&lt;/strong&gt;&lt;/p&gt;

&lt;p&gt;1990년대는 대단했죠. 신행주대교 붕괴사고, 성수대교 붕괴사고, 위도 유람선 침몰사고, 목포 공항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사고, 부산 구포 열차사고, 동해안 잠수정 침투사건, 대구 지하철 가스폭발사고…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이 정도네요. 그 모든 대형 사건사고 현장에는 중계차와 함께 제가 있었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도 생각나네요. 그때는 제가 원고 하나 없이 장장 3시간을 생방송으로 현장 중계를 하기도 했죠. 그런 사고가 나면 2~3일 잠 못 자는 건 일도 아니었어요. 그 외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특종은 ‘부천세무비리사건’이죠. 당시는 컴퓨터가 보편화되기 전이라 구청 세무공무원들이 세금을 받으면 복사지를 긁어서 영수증을 민원인에게 줘요. 또 다른 한 장은 구청에서 보관하고 나머지 한 장은 은행으로 보내야 했죠. 그런데 당시 공무원들이 그 돈을 자기 호주머니로 넣었다는 게 문제였어요. 그때는 많고 적고의 차이지 지방세무과에서 비일비재한 비리였어요. 그걸 부천 소사구청에서 제가 단독으로 취재해 전국적인 특종을 했죠. 한달 이상 전국 지방세과를 대상으로 감사가 이뤄졌고 비리는 완전히 단절 됐어요. 물론 컴퓨터가 보급되고 난 이후에는 불가능한 비리가 됐죠.&lt;/p&gt;

&lt;p&gt;&lt;strong&gt;Q 지금도 OBS에 계시면서 취재에 나선 젊은 기자들을 보면 옛 기억이 떠오르실 듯 합니다. 보도국에 애착이 크실 듯 한데요?&lt;/strong&gt;&lt;/p&gt;

&lt;p&gt;당연하죠. 하지만 예전만큼 투지가 안 보인다는 안타까움은 있어요. 제가 MBC에 있을 때도 기자들 면접시험을 보면 정형화된 스타일의 기자들이 많이 들어와요. 고등학교는 외고나 과학고, 대학은 서울, 연•고대죠. 사실 국민대학교 출신이 없다는 게 안타깝기도 해요. 면접을 볼 때는 출신학교 란을 가리고 뽑는데도 합격자를 보면 없어요. 어쨌든 거의 판에 박은 듯한 기자들이 배출되면서 예전처럼 돌출행동을 하는, 혹은 기자다운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요. 물론 사회 분위기도 예전처럼 기자라고 해서 대접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자라면 때론 돌출행동이 필요하거든요. 제가 말하는 돌출행동은 행동 자체가 창조력이 뛰어난 게 아니라 행동의 근거가 되는 돌출적인 사고방식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제가 있던 시절 카메라출동, 시사매거진 2580에서 창조력을 최대한 발휘한 취재, 기억에 남는 특종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걸 보기 힘들다는 게 안타깝죠.&lt;/p&gt;

&lt;p&gt;&lt;strong&gt;Q 아무래도 미디어환경의 변화도 영향이 있을 듯 한데요. iMBC 총괄이사를 지내신 2003년부터 KT 미디어허브 이사로 계셨던 최근까지는 경영자로서 우리나라 미디어 환경의 변화를 직접 경험하셨을 듯합니다.&lt;/strong&gt;&lt;/p&gt;

&lt;p&gt;그것은 미디어에 오래 종사한 저 같은 사람의 숙제이자 난제이기도 해요. 앞으로 예측되는 미디어의 발전에 대해 기대가 있어요. 하지만 우려 섞인 기대죠. 이제까지 미디어는 ‘매스미디어’라는 말 그대로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대중을 연결시켜준다는 중간, 매개체라는 의미였어요. 하지만 최근에는 매스미디어가 개별미디어 즉, SNS와 같은 채널과 뭉쳐져서 보이는 경우가 훨씬 많아요. 미디어 형태의 변화죠. 그 형태의 변화가 기존 대중매체인 신문과 방송의 기능을 상당히 떨어뜨리고 있어요. 예전에는 언론이 어젠다를 만들어서 규정을 지으면 됐는데, 지금은 전문가들 직접 옳다, 그르다를 얘기하는 시대가 됐죠. 아마도 앞으로는 개인이 제작하는 미디어들이 한 군데로 모일 거라 생각해요. 종전의 전통적인 미디어의 기능도 하면서 새로운 것을 가미해서 미디어 역할을 수행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미국 같은 경우는 미디어 자체의 변화가 상당히 빠르게 일어나고 있죠. ‘허핑턴포스트’라던가, ‘버즈피드’가 최근에 급부상하고 있고요. 그렇다고 전통적인 미디어가 없어지진 않을 거에요. 역할과 기능은 유지하겠지만 위축은 되겠죠. 다만 그런 환경에서 어떤 수익 모델을 만들어 가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해요.&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5/0105142/img_1_07.jpg&quot; style=&quot;max-width: 100%;&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대학 시절 극복하기 힘들었던 핸디캡 같은 것이 있으셨는지요? 혹 있으셨다면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궁금합니다.&lt;/strong&gt;&lt;/p&gt;

&lt;p&gt;저는 끈기가 부족했어요. 그래서 어떤 것에 대해 호기심은 많이 생기지만, 그걸 오래 끌고 가질 못했죠. 공부에도 끈기가 필요했는데, 한 때는 30분이 멀다 하고 자리를 뜨기 일쑤였어요. 하지만 고쳐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자리를 뜨는 빈도를 줄이려 노력했어요. 나중에는 2시간 연속으로 앉아서 공부할 수 있을 정도가 됐죠. 뭐든 한 번은 실수할 수 있어요. 문제는 그 실수가 반복되는 거죠. 전 실수를 메모하고 절대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했어요. 똑 같은 일이 벌어지면 방법을 바꿔 시도하는 식으로 실수를 극복했고, 끈기 없는 단점도 없앴죠. 기자 생활에서도 그 습관은 발휘됐는데, 한 번은 공사장 추락사고 기사를 쓰면서 전화취재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죠. 마감에 쫓겨 그대로 뉴스가 나갔어요. 하지만 추락한 사람은 죽지 않았고 큰 오보가 됐죠. 직접 찾아가 사과를 하고 수습을 하면서 전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 이후로는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 됐어요. 나중에는 취재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도 확인하는 것이 습관화 되더군요(웃음).&lt;/p&gt;

&lt;p&gt;&lt;strong&gt;Q 사장님께서 대학을 다니셨을 때와 지금의 상황은 여러 가지로 다릅니다. 요즘 학생들을 보실 때 칭찬하고 싶으신 점, 또 조언해 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lt;/strong&gt;&lt;/p&gt;

&lt;p&gt;저도 자녀들이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는 과정을 지켜봤어요. 정말 지금하고 그때하고는 천지차이죠. 당시에는 대학생의 비율이 적기도 했고, 어느 대학을 나오더라도 대학생이라는 것 자체가 특권이었으니까요. 물론 경제 역시 성장기라 대졸자면 취직도 잘됐고요.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요. 젊은 세대의 70~80%가 대학졸업자에다가 경제는 저성장 구조가 됐고 고용인원은 쉽게 늘어나지 않죠. 그 자체가 학생들에게는 상당한 고통이라고 생각해요. 예전보다 더 애쓰고 있는 학생들에게 노력, 정신력을 이야기하는 것은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제 자녀들도 취직을 위해 밤새 공부하고 혼자 원서 제출하러 다니는 걸 보면서도 도와줄 방법이 없더군요. 안타까움이 크죠. 결국은 우리 세대가 할 일은 새로운 산업을 만들고 일자리를 늘려야 하는 건데, 현재는 그런 동력이 부족한 상황이라 생각해요. 제 나름 대로는 젊은 세대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방송 콘텐츠를 통해 도움이 되고자 해요.&lt;/p&gt;

&lt;p&gt;&lt;strong&gt;Q 방송기자, 혹은 방송 분야에서 일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어떤 준비를 하면 좋을지 선배의 입장에서 실질적인 조언을 해 주신다면?&lt;/strong&gt;&lt;/p&gt;

&lt;p&gt;우선은 외국어 실력이 뛰어나야 해요. 다른 실력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외국어 실력이 탁월하다면 그와 관련된 업무를 맡을 수 있거든요. 정규직이 될 확률도 높아지고요. 또 약간 눈높이를 낮춰서 기회를 확보하는 게 좋아요. 저 역시 춘천 MBC에 입사한 것이 서울 MBC로 오는 첫 번 째 기회였다고 할 수 있어요. 처음에는 지방 방송사 기자였지만, 지금은 서울 MBC 방송기자를 거쳐 임원,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죠. 기회만 잡으면 실력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관리자들은 잘하는 사람을 찾게 돼 있거든요. 물론 이것이 정답은 아니에요.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을 알기에 안타깝지만 노력 하라는 말보다는 힘내라고 말 해주고 싶네요.&lt;/p&gt;

&lt;p&gt;&lt;strong&gt;Q 마지막으로 꿈을 향해 정진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격려의 말씀 부탁 합니다.&lt;/strong&gt;&lt;/p&gt;

&lt;p&gt;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마음에 새기고 다닌 “不飛卽已(불비즉이)나 一飛沖天(일비충천)하고, 不鳴卽已(불명즉이)나 一鳴驚人(일명경인)”이란 글귀가 있어요. “새는 날지 않았으나 일단 날면 높은 하늘에 이를 것이고, 울지 않았으나 일단 울면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라는 뜻이죠. 초나라의 장왕이 3년 간 주색잡기를 하며 국정을 소홀히 했는데, 이는 충신과 간신을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3년이 지난 해에 간신을 처단하고 나라를 제대로 경영했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장왕의 고사처럼 기회를 노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언제는 기회가 올 때 그것을 잡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 준비를 해야죠. 준비가 된 사람은 기회가 왔을 때 자신의 능력을 보여 줄 수 있어요. 한 번 도전에 실패했다고 낙담하지 않았으면 해요. 제가 그런 경험이 없다면 무책임한 말일 수 있지만, 저 역시 여러 번 도전하고 기회를 준비한 과정을 거쳤기에 드리는 말씀이에요. 물론 각박한 현재의 상황에서는 이런 말 역시도 미안하고, 안타까움이 더 앞섭니다. 그저 어려운 여건에서도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는, 응원을 하고 싶어요.&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right;&quot;&gt;&lt;strong&gt;윤정식&lt;/strong&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right;&quot;&gt;&lt;strong&gt;소속&lt;/strong&gt;&lt;br /&gt;
OBS 경인TV 대표이사 사장&lt;/p&gt;

&lt;p style=&quot;text-align: right;&quot;&gt;&lt;strong&gt;학력&lt;/strong&gt;&lt;br /&gt;
휴스턴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석사&lt;br /&gt;
국민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lt;/p&gt;

&lt;p style=&quot;text-align: right;&quot;&gt;&lt;strong&gt;경력&lt;/strong&gt;&lt;br /&gt;
2015.07 ~OBS 경인TV 대표이사 사장&lt;br /&gt;
2013.09 KT미디어허브 이사&lt;br /&gt;
2013.08 KT CR본부 본부장&lt;br /&gt;
2013.07 KT 부사장&lt;br /&gt;
2011.02 ~ 2013.06 충주MBC 사장&lt;br /&gt;
2010.03 ~ 2011.02 청주MBC 사장&lt;br /&gt;
2009.03 MBC 편성본부 편성국 홍보시청자부장&lt;br /&gt;
2008.03 MBC 홍보심의국 부국장&lt;br /&gt;
2006.08 MBC 홍보심의국 홍보부장&lt;br /&gt;
2003 iMBC 총괄이사&lt;br /&gt;
2003.07 MBC 인터넷뉴스센터&lt;br /&gt;
1983 MBC&lt;/p&gt;
</description>
            <author>박차현</author>
            <pubDate>Thu, 01 Jan 1970 09:00:00 +0900</pubDate>
        </item>
        <item>
            <title>동문 CEO - (주)동아오츠카 민장성 대표를 만나다 / 물리교육학과 86학번</title>
            <link>1066114</link>
            <description>&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5/0105039/1.jpg&quot; style=&quot;max-width:100%&quot; /&gt;&lt;/p&gt;

&lt;p&gt;얼마 전 창립 37주년을 맞이한 동아오츠카는 포카리스웨트, 데미소다, 오란씨, 블랙빈테라피 등 다양한 음료를 생산하며 한국 식·음료업계에 강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히 간판 브랜드인 포카리스웨트는 ‘내 몸에 가까운 물’이라는 광고 카피가 큰 히트를 치며 지금까지도 현대인들의 수분섭취를 돕는 건강음료로 인기를 끌고 있다. 동아오츠카가 사명을 바꾸고 본격적인 음료시장의 강자로 떠오르던 1992년은 민장성 사장이 동아제약에 입사한 해이기도 했다. 지난해 그가 동아오츠카 사장으로 취임한 것은 우연만은 아닌 듯하다. 1992년 입사 후 그는 동아제약 의약실 팀장, 비서실장, 동아에스티 대구지점 지점장 등을 거치며 24년 간 크고 작은 성과를 이어왔다. 국민대학교 물리교육학과 동문이자 성공한 기업인으로서 그가 기억하고 있는 젊은 시절의 노력과 한 기업에 평생을 몸 담으며 깨달은 삶의 지혜에 대해 들어보았다.&lt;/p&gt;

&lt;p&gt;&lt;br /&gt;
&lt;strong&gt;평범함 속에서 큰 비범함&lt;/strong&gt;&lt;/p&gt;

&lt;p&gt;동아제약 영업부서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 신입사원은 회사와 함께 성장했고, 오늘날 계열사인 동아오츠카의 사장이 됐다. 그간 그가 몸담았던 제약업계에서는 크고 작은 일들이 적지 않았다. 그 중 가장 큰 사건은 2000년 의약분업이다. 박카스와 같은 약국판매약 강자였던 동아제약에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가 됐다. 동아제약은 의약분업이라는 위기를 그간 부족한 것으로 평가됐던 전문의약부문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한 것이다. 민장성 사장을 비롯한 당시 임직원들은 회사를 전문의약품 기업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의약업계 강자로서 동아제약의 위상은 유지될 수 있었다. 이렇듯 제약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그가 동아오츠카의 사장으로 발령이 난 것은 그 스스로도 의외였다고 한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5/0105039/2.jpg&quot; style=&quot;max-width:100%&quot; /&gt;&lt;br /&gt;
지난 3월 2일 창립기념식에서 민장성 사장은 기본, 소통, 책임을 강조했다.&lt;/p&gt;

&lt;p&gt;&lt;br /&gt;
&lt;strong&gt;Q&amp;nbsp;동아오츠카로 사명을 바꾼 1992년, 그 해 입사한 신입사원이 세월이 흘러 사장으로서 부임했습니다. 감회가 남다르실 듯한데요.&lt;/strong&gt;&lt;/p&gt;

&lt;p&gt;처음 사장 발령이 났을 때는 저도 어리둥절했죠. 제약업계에 너무 익숙해진 터라 처음에는 마치 신입사원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도 들더군요(웃음). 그러면서 동아오츠카가 경쟁하고 있는 식·음료업계에 대해 살펴보기 시작했어요. 최근 알파고와 이세돌 기사의 대결, 기억하시죠? 첨단 산업에 이어 인공지능까지 등장하는 미래에 식·음료업계의 비전은 무엇일까를 고민했어요. 우리나라는 이제까지 중화학 중심의 고도성장을 이뤄왔죠. 하지만 지금은 저성장과 기술혁명이 맞물려있는 시기예요.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는 시대지만, 성장률은 낮고 불확실성은 커졌죠. 여러 가지 변수가 많겠지만 그럼에도 전 물과 관련된 사업만은 지속발전이 가능하리라 보고 있어요.&lt;/p&gt;

&lt;p&gt;&lt;strong&gt;Q&amp;nbsp;평사원으로 입사해 사장의 자리에까지 오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요.&amp;nbsp;그 바탕이 된 청년기는 어떠하셨는지 궁금합니다.&lt;/strong&gt;&lt;/p&gt;

&lt;p&gt;저희 집은 아주 평범한 가정이었어요. 사교육은 생각도 못한 중·고교시절을 보냈죠. 가정 형편도 여유로운 편은 아니었지만, 그때는 법으로 과외가 금지됐던 시절이기도 했고요(웃음). 그저 학교와 독서실을 다니는 것이 공부의 전부일 정도로 평범한 학생이었고, 학업성적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죠. 하지만 되돌아 보면 돌아가신 아버님께서는 당신이 살아가는 모습으로 교육을 하셨다고 생각해요. 그걸 사회인이 되고 나서 깨달았죠. 아버님은 굉장히 열심히 사신 분이었고, 정직하려 노력하신 분이셨어요. 저 역시도 아버님을 본받아 공정하려 노력했고 객관성이 결여되지 않은 판단을 하려 노력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해요.&lt;/p&gt;

&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5/0105039/3.jpg&quot; style=&quot;max-width:100%&quot; /&gt;&lt;/p&gt;

&lt;p&gt;그는 국민대학교 물리교육학과에 입학할 당시까지도 특별한 꿈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꿈이 없기는 마찬가지라며 웃는다. 다만 그가 남달랐던 것은 거창한 꿈 대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잘 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는 점이다. 짧게는 2년, 길게는 5년까지 그는 현실적인 계획을 세웠다. 불가능한 꿈을 꾸기보다 실현 가능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amp;nbsp;성공의 비결에 대해 묻는 질문도 많이 받아보셨을 것 같습니다.&lt;/strong&gt;&lt;/p&gt;

&lt;p&gt;후배들 중에서 ‘사장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물어오는 친구들이 있긴 해요(웃음). 그러면 저는 사장이 되려는 생각부터 버리라고 하죠. 사실 제가 그랬거든요. 평사원으로 입사해서 사장을 꿈꾼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죠. 전 그럴 바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계획하고 노력하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살아왔어요. 그게 비결이라면 비결이죠.&lt;br /&gt;
&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최근 학교를 방문하신 적은 있으신지요? 옛 추억이 떠오르는 공간은 없으신지 궁금하네요.&lt;/strong&gt;&lt;/p&gt;

&lt;p&gt;지난 3월에 한번 간 적이 있어요. 옛 사범대 자연관하고 공학관은 그대로 더군요. 나머지는 새로 생긴 건물이 많아서 예전과는 꽤 달라졌다는 걸 느꼈어요. 공학관 앞에서 족구를 하던 게 생각나네요. 그때 사범대 족구가 꽤 강했거든요. 저도 나름 족구는 한 실력 했죠(웃음). 족구 한 게임을 하고 나서 친구들과 함께 ‘뒷포’라고 불렀던 후문의 포장마차에 가서 홍합탕에 술 한 잔을 하며 유쾌한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떠오를 때면 지금도 웃음이 나요.&lt;br /&gt;
&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그 시절, 사장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은 무엇이었나요?&lt;/strong&gt;&lt;/p&gt;

&lt;p&gt;대학시절에는 그저 노는 걸 참 좋아했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즐거웠어요. 공부도 중요하지만 저는 그 시기에 관계를 형성하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해요. 결국은 인간관계라는 말이죠. 그 시절을 통해 깨달은 것은 내가 남에게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인간관계는 한계가 있다는 거였어요. 일종의 계산된 인간관계인 거죠.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객관성을 바탕으로 공정하게 처신하려 노력하고 사람을 대한다면, 최소한 부도덕하거나 사심이 있는 사람으로 비춰지진 않는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그런 소신은 변함이 없죠.&lt;/p&gt;

&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5/0105039/4.jpg&quot; style=&quot;max-width:100%&quot; /&gt;&lt;/p&gt;

&lt;p&gt;&lt;br /&gt;
그의 대학시절은 군 생활을 계기로 큰 변화를 맞이했다. 입대 전 대학시절이 인간관계를 배우고, 성인으로서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던 시기라면, 제대 후 대학시절은 자신을 돌아보고, 미래를 준비하던 시기였다고 한다. 그는 그 시기에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고 털어놓았다.&lt;br /&gt;
&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대학 시절, 미래를 결정 지은 터닝포인트가 있다면 어떤 순간을 꼽을 수 있을까요?&lt;/strong&gt;&lt;/p&gt;

&lt;p&gt;군 입대가 변화의 계기가 됐죠. 전방에서 복무를 했는데, 한 밤중에 경계근무를 서다 보면 보이는 것은 밤하늘의 별빛이고 생각나는 것은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이었어요. 다행히 복학 후 2년이라는 시간이 남아있었죠(웃음). 그때부터 현실적인 판단 하에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그 당시는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되기 전이었지만, 저는 일본문화 특유의 독특한 다양성에 끌렸어요. 그렇게 시작한 공부가 이후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됐어요. 당시 함께 공부한 친구는 지금 일본에서 사업을 하고 있죠. 그 때를 생각하면 지도교수님이셨던 김철성 교수님이 떠오릅니다. 제 계획을 들어주셨고, 많이 이해해 주셨거든요. 교수님의 배려 덕분에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죠(웃음).&lt;/p&gt;

&lt;p&gt;&lt;br /&gt;
&lt;strong&gt;24년의 성과와 깨달음&lt;/strong&gt;&lt;/p&gt;

&lt;p&gt;동아제약 영업부 신입사원으로 시작한 사회생활은 그 역시도 쉽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어렵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털어 놓는다. 하지만 어려울수록 ‘오기’도 발동했다. “영업은 정답이 없다, 다만 해법을 쫓을 뿐”, 그가 제약 영업을 하며 깨달은 진리(?) 이다. 계획단계에서부터 성과를 내기까지 무수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모두 밝힐 수는 없다. 개중에는 대외비가 포함돼 있는, 영업 노하우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신입 시절 충격적인 사건으로 19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 사고’를 꼽았다. 중요한 계약 서류를 깜박하고 회사에 놓고 간 덕분에 그는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 죽을 위기를 넘긴 사람은 뭔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무너진 성수대교를 보며 아찔함을 느낀 그는 이후 무엇을 이뤄냈을까?&lt;/p&gt;

&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5/0105039/5.jpg&quot; style=&quot;max-width:100%&quot; /&gt;&lt;/p&gt;

&lt;p&gt;&lt;br /&gt;
&lt;strong&gt;Q 이제까지 해 오신 일 중 가장 큰 성과라고 꼽을 만한 것은 무엇일까요?&lt;/strong&gt;&lt;/p&gt;

&lt;p&gt;2000년 의약 분업이 도입된 이후 제약사의 미래가치는 전문의약품의 매출에 따라 좌우됐어요. 동아제약 역시 마찬가지였죠. 저는 1995년 무렵 영업직을 떠나 마케터로서 동아제약이 개발한 신약 1호인 스티렌의 프로덕트 매니저로 일 했어요. 위염치료제인 스티렌은 국산 신약으로 가장 성공한 케이스가 됐죠. 제가 후임에게 넘겨줄 때 연간 매출액이 600억원이었는데, 그 이후에는 1,000억원에 육박할 정도의 성과를 올렸거든요. 거대 외국계 제약사들이 매출 상위를 독식할 때 매출 3위까지 올라간 제품은 스티렌이 유일했어요. 당시 국내 개발 신약으로서 최고의 기록이었고, 제 개인적으로도 가장 큰 성과였다고 할 수 있죠.&lt;/p&gt;

&lt;p&gt;&lt;strong&gt;Q 이제까지 거쳐 온 업무 중 가장 애착이 갔던 업무는 무엇인가요?&lt;/strong&gt;&lt;/p&gt;

&lt;p&gt;동아제약 강신호 회장님의 비서실장을 맡았을 때가 제일 기억에 남아요. 강 회장님은 제29대와 30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역임하신 대단한 분이시죠. 곁에서 모시며 배울 점이 많았어요. 의학박사이시기도 한 회장님은 늘 배려를 강조하셨죠. ‘무관심은 죄악이다, 항상 남이 잘 되게끔 해야 나도 잘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그리고 자기 일은 자기가 하며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중요시 하셨죠. 회장님은 가방 하나 비서에게 맡기는 법 없이 늘 본인이 들고 다니셨어요.&lt;/p&gt;

&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5/0105039/6.jpg&quot; style=&quot;max-width:100%&quot; /&gt;&amp;#39;우리는 사회정의에 따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우수한 의약품을 생산하여 인류의 건강과 복지향상에 이바지한다&amp;#39; 동아제약의 사시에는 민장성 사장이 강조하는 기업가치가 담겨 있다.&lt;/p&gt;

&lt;p&gt;&lt;br /&gt;
그는 7년 간 강신호 회장을 보필하며 진정한 ‘배려’를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평생을 제약업에 몸담았던 그가 식·음료 자회사인 동아오츠카 사장으로 임명된 것은, 아마도 오너의 철학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제약업에 비해 트렌디한 식·음료 기업의 사장으로서 그의 관심은 그 어느 때 보다 젊은 세대에게 향해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제약에서 음료로 업무가 바뀌시고 나서 이전과 달라지신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lt;/strong&gt;&lt;/p&gt;

&lt;p&gt;제약업에서는 약을 마케팅 하는 데 있어 규제가 심해요. 아무래도 정부의 보험제도 내에 포함 된 제품이라 한계가 있었죠. 당시에는 일상 생활용품이나 식·음료업계의 자유로운 마케팅이 부럽기도 했고, 언젠가는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죠. 식·음료기업으로서 동아오츠카는, 회사의 경비 업무를 담당한 직원부터 사장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저 역시 트렌드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됐죠. 하지만 트렌드도 주시하는 한편, ‘생활 속의 수분을 보충하는 건강음료 기업’이라는 동아오츠카의 기본 이념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본적으로는 사장으로서 좋은 회사를 만들겠다는 각오를 매일 새롭게 하고 있죠(웃음).&lt;/p&gt;

&lt;p style=&quot;text-align: right;&quot;&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5/0105039/7.jpg&quot; style=&quot;max-width:100%&quot; /&gt;&lt;br /&gt;
사진제공_ 동아오츠카&lt;/p&gt;

&lt;p&gt;&lt;br /&gt;
&lt;strong&gt;Q&amp;nbsp;대표 브랜드인 포카리스웨트는 청순한 이미지의 스타마케팅을 하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amp;nbsp;최근에는 김소현 씨가 모델로 주목을 받고 있는데요.&amp;nbsp;사장님께서 바라보시는 20대의 장점과 단점을 말씀해 주신다면?&lt;/strong&gt;&lt;/p&gt;

&lt;p&gt;지금 20대는 모두 저보다 훌륭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어떤 평가를 할 수 있는 입장은 못 되죠. 그럼에도 굳이 이야기하자면, 요즘 회사에 입사하는 신입사원을 볼 때 느끼는 아쉬움은 있어요. 이를테면 개인 중심적인 부분이죠. 그런 점이 개성이 될 수도 있지만, 사회 구성원으로서는 걱정스러운 부분도 있거든요. 인문학이 떠오르는 것도 이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해요. 과거의 지혜를 통해 지금을 재조명하는 것이 인문학이잖아요. 이처럼 젊은 세대들도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노력을 기울이는 게 어떨까 싶네요.&lt;/p&gt;

&lt;p&gt;&lt;strong&gt;Q&amp;nbsp;20대는 인생의 다양한 길을 앞 두고 무수한 결정을 해야 하는 시기인데요.&amp;nbsp;사장님께서는 그 시기에 어떤 기준으로 선택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lt;/strong&gt;&lt;/p&gt;

&lt;p&gt;저는 제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선택을 받는 입장인 경우가 많죠. 제가 한 일은 회사나 다른 사람이 나를 선택하게 끔 준비한 것뿐이에요. 이는 다른 말로는 남이 나를 선택한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는 의미기도 해요. 내 선택만 옳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의 선택은 받아들일 수 없거든요. 큰 의미에서 회사의 인사발령이나 업무지시도 내 선택이 우선시 될 때는 부당하게 느껴지게 돼요. 반면 왜 나를 선택한 것인지 그 이유를 생각하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 지가 분명해지죠.&lt;/p&gt;

&lt;p&gt;그는 취업을 앞둔 후배들에게 ‘성공’이라는 단어에 집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했다. 우리나라를 이끌어 갈 미래세대라면 누구나 각자의 역할이 있고 의미가 있는 삶이라고도 했다. 또한 사회가 정한 성공의 기준이나 타인의 눈을 의식하기보다는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최선을 다 하라고 조언한다.&lt;/p&gt;

&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5/0105039/8.jpg&quot; style=&quot;max-width:100%&quot; /&gt;&lt;/p&gt;

&lt;p&gt;&lt;strong&gt;&quot;미래 가치가 있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회사라면 좋지 않을까요?&amp;nbsp;&lt;br /&gt;
첫 발은 중요하지만, 시작부터 성공이라는 단어를 의식해&lt;br /&gt;
스스로 위축될 필요는 없습니다.&quot;&lt;/strong&gt;&lt;/p&gt;

&lt;p&gt;&amp;nbsp;&lt;/p&gt;
</description>
            <author>박차현</author>
            <pubDate>Thu, 01 Jan 1970 09:00:00 +0900</pubDate>
        </item>
        <item>
            <title>동문 CEO - (주)아르테마니아 백규선 대표를 만나다 / 일반대학원 ...</title>
            <link>1066113</link>
            <description>&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5/0105032/1.jpg&quot; style=&quot;max-width: 100%;&quot; /&gt;&lt;/p&gt;

&lt;p&gt;틀에 박힌 일상은 빤하다. 불행하다기 보다는,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몰입하는 무언가가 간절해질 때가 있다. 어차피 인생은 긴 경주 아닌가. 모든 것을 쏟아 부어도 아깝지 않을 일, 그리고 그 일을 통해 내 자신을 더욱 잘 들여다보게 되는 일이 필요하다. 물론 한 순간의 결정이 쉬울 리 없다. 위험할 수도, 무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서히 준비하는 시간이 무엇보다 필요했고, 결코 만만치 않은 과정도 넘어서야 했다. 그러고 나니, 새로운 세상을 향해 힘찬 날갯짓 할 수 있는, 제법 든든하고 커다란 날개를 갖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 rgb(178, 34, 34);&quot;&gt;&lt;strong&gt;오랜 세월 품고 있던 ‘가능성’과 ‘꿈’을 꺼내 들다&lt;/strong&gt;&lt;/span&gt;&lt;/p&gt;

&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5/0105032/2.jpg&quot; style=&quot;max-width: 100%;&quot; /&gt;&lt;br /&gt;
&lt;br /&gt;
대학에서 행정학을 전공한 백규선은 졸업을 앞두곤 행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포스코 입사시험을 치르게 됐고, 덜컥 합격하는 바람에 고시에 더 이상의 미련을 갖지 않기로 했다. 포스코를 거쳐 SK텔레콤까지 20년간 조직 생활을 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대기업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고, 피곤과 권태도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 시간이 후회스럽거나 불행했다곤 할 수 없다. 그만큼 성과와 보상을 누렸기 때문이다. 다만, 오래 머물던 둥지를 떠나고픈 갈망이 일기 시작했다. 마흔에 막 다다를 무렵이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5/0105032/3.jpg&quot; style=&quot;max-width: 100%;&quot; /&gt;&lt;/p&gt;

&lt;p&gt;“직원 교육 파트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다보니,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는 강연자의 역할이 어느 순간 익숙해졌어요. 교육을 받거나 강연을 청강해야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한 번은 오페라로 강연을 듣게 되었지요. 다룰 줄 아는 악기 하나 없던 제가, 악보조차 볼 줄 모르던 무지한 제가 오페라를 접했던 그 날의 신선한 느낌~. 오랜 세월 내 안에 숨어 있는 ‘가능성’과 ‘꿈’을 찾은 것 같더라고요.”&amp;nbsp;&lt;/p&gt;

&lt;p&gt;몇 날 며칠이 지나도 그 떨리던 감정이 사그라들지 않자, 본격적으로 오페라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내 안에 수만 개의 상자가 있다 해도, 만남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것들을 열 수 없고, 그냥 두면 그것들이 아무런 의미 없이 사라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조바심 내며 전전긍긍하던 긴장감마저 너무도 행복했다던 그는 오페라를 하나씩 만나면서 세상이 넓어지고 있음을 온 몸으로 체감하게 됐고, 왠지 모르게 오페라가 자신의 삶조차 송두리째 바꿔줄 것 같은 예감을 하게 됐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5/0105032/4.jpg&quot; style=&quot;max-width: 100%;&quot; /&gt;&lt;/p&gt;

&lt;p&gt;“오페라를 부를 수 없다면, 전문적으로 오페라를 해설하고 무대를 경영하고 싶다는 청사진을 그리게 됐습니다. 그리고 바로 국민대학교 경영대학원에 2011년, 리더십 박사과정으로 입학하게 됐습니다. 리더십전공 MBA 박사과정을 택한 이유는 백기복 교수님의 강의를 듣기 위해서였죠. 그 분야에선 최고의 스승이기 때문이지요. 재직 중이었기 때문에 일과 공부를 병행하기가 쉬운 게 아니었지만, 각오했기에 그 바쁜 시간마저 즐겼던 것 같습니다(웃음).”&amp;nbsp;&lt;/p&gt;

&lt;p&gt;경영학 박사과정을 마칠 무렵, 그는 또 한 번의 도전을 하게 된다. 휴가 때마다 찾던 오페라의 본 고장, 이탈리아에서 본격적으로 공부하기로 한 것이다. 국내에서는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니, 이탈리아에서는 예술학 박사 과정을 밟아보기로 한 그는 심사숙고 끝에 가스파레 스폰티니 공립음악원(Istituto Musicale Gaspare Spontini)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amp;nbsp;&lt;/p&gt;

&lt;p&gt;“휴가 때마다 좋아하는 음악가들의 고향이나 생가 등을 성지순례 하듯 찾아다니는 것만으론 갈증을 느꼈나 봐요. 오페라의 속살 그대로를 만나려면 현지에서 공부하는 것, 그 이상은 없다는 결론이었어요. 틈틈이 언어를 공부했고, 나름의 준비과정을 거쳤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어요. 물론 수업 방법은 재직 중이었기에 출석보다는 과제와 테스트 등을 택해야했는데, 훨씬 어려운 관문을 통과했어야 했지요.”&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오늘의 열정은 내일의 또 다른 열정으로 이어지다&lt;/strong&gt;&lt;/p&gt;

&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5/0105032/5.jpg&quot; style=&quot;max-width: 100%;&quot; /&gt;&lt;/p&gt;

&lt;p&gt;1년에 한 달 남짓, 이탈리아에서 체류하며 예술학 박사 과정을 밟아가던 그는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지난 2015년, 과감히 회사에 사표를 던지기까지 했다. 적잖은 연봉과 그로 인한 경제적인 안정을 생각하면 후회할 수도 있었고, 가족들의 반대도 있었을 터인데 그는 이런 결정마저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이야기를 이어간다.&amp;nbsp;&lt;/p&gt;

&lt;p&gt;“아내와 가족의 이해 없이는 절대 안 되는 일이지요. 오페라를 만나면서 그리고 그 오페라로 인생 2막을 위해 다년간 치밀하게 준비하는 것을 곁에서 봐왔으니, 그간의 여러 결정과 변화에 큰 반향은 없었어요. 이는 20여 년간 직장 생활로 가장 역할을 성실하게 임했으니, 가능했던 이해와 배려라고 자화자찬 하고 싶네요(웃음).”&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5/0105032/6.jpg&quot; style=&quot;max-width: 100%;&quot; /&gt;&lt;/p&gt;

&lt;p&gt;이탈리아에서 예술학 박사 과정을 마칠 무렵, 그가 말하는 인생 2막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다. &amp;lt;아르테마니아(ArteMania)&amp;gt;는 ‘arte(예술)+mania(좋아하는)’의 합성어다. 예술에 대한 그의 열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백규선 대표는 &amp;lt;아르테마니아&amp;gt;를 설립해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세상에 첫 날갯짓을 한다. 그는 해설이 절묘하게 곁들여진 오페라 갈라 콘서트, 현악 3중주 콘서트, 리더를 위한 오페라 이야기, 예술에서 배우는 경영의 지혜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세상에 하나씩 꺼내놓았다.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최근 새롭게 개설한 SNS(밴드) ‘영혼을 깨우는 아리아’만 봐도 회원 수가 2천 여 명 훌쩍 넘을 정도이니 말이다.&amp;nbsp;&lt;/p&gt;

&lt;p&gt;“오페라는 문학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우리의 희로애락과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여러 장비를 동원하거나 때로는 가수의 노래를 눈앞에서 감상하곤, 해설과 함께 의견을 나누는 시간도 갖게 되는 것이지요. 대부분 기업이나 대학, 공공단체에서 의뢰가 오는 편인데, 올 8월에는 한 여행사와 이탈리아로 예술 여행을 떠나는 프로그램도 진행할 예정으로 있습니다.”&lt;br /&gt;
서울의 경영전문대학원(MBA)에서 강의까지 맡고 있는 그는 예술을 경영에 접목해, 오페라 티켓 구매가 가능한 서비스까지 점차 확대해나가려 한다. 멀게만 느껴졌던 오페라 무대가 대중과 가까워지게 만드는 일에 결코 주저하지 않을 생각인 것이다. 그렇다보니 직장 다닐 때보다 더 일찍 하루를 시작할 정도로 바쁘고 부지런한 일상이 이어져 오고 있다.&amp;nbsp;&lt;/p&gt;

&lt;p&gt;“좋아하는 일에 몰입했을 때 느끼는 희열의 결과가 많은 사람에게 감동으로 돌아가게 해야죠. 오늘의 열정은 내일의 또 다른 열정으로 이어지는 것이고요. 국민대 학생 여러분들도 분명히 좋아하는 일, 몇 개씩은 갖고 있을 겁니다. 아직 잘 모르겠다면, 아니면 생각을 깊게 안 해봤다면, 내 전부를 쏟아 붓게 될 그 무언가가 조만간 나타날 겁니다. 저도 대학 졸업하고 평범하게 직장생활 하다가, 뒤늦게 오페라를 만나지 않았습니까.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흔한 말로 누구에게나 다, 기회는 다가오니까요. 다만 그때가 분명히 올 것이라는 믿음은 가지십시오. 내가 믿는 만큼, 내가 간절한 만큼, 마음껏 그릴 세상은 꼭 나타나는 게 인생이라는 사실,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description>
            <author>박차현</author>
            <pubDate>Thu, 01 Jan 1970 09:00:00 +0900</pubDate>
        </item>
        <item>
            <title>동문 CEO - (주)KNBCOS 주은규 대표를 만나다 / 행정학과 73학번</title>
            <link>1066097</link>
            <description>&lt;p&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4/0104948/gaq32.jpg&quot; style=&quot;max-width: 10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국민대학교 행정학과 73학번. 어느 순간 ‘이게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 행시에서 기업 입사로 방향을 틀었다. 지금처럼 다양한 스펙을 요구하지 않았던 당시에도 취업난은 있었다.&amp;nbsp;입사방법은 오직 하나 공채뿐. 시험에 전력투구했다. 갖은 노력 끝에 1983년, 엘지화학(현 엘지생활건강)에 입사했다. 20년동안 열심히 일한 그는 2003년 ‘나의 일’을 찾아 독립했다. (주)KNBCOS 주은규 대표의 이야기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right;&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그가 부장이 되었을 때, 입사 동기들 중 10% 정도가 곁에 있었다. 자의든 타의든 대부분이 모두 회사를 떠났다. 학벌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 기업에서 생존을 위해 필요했던 것은 남과 다른 경쟁력이었다. 그의 경쟁력은 업무 관련 전문성, 실력, 근면함, 원활한 대인관계 그리고 30대를 방불케 하는 체력이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strong&gt;인생 전반전, ‘엘지생활건강’ 영업부문장으로 마무리&lt;/strong&gt;&lt;br /&gt;
(주)KNBCOS는 주은규 대표와 직원 1명으로 2003년 시작한 화장품 유통 전문회사다. &amp;lt;LUNASOL&amp;gt;&amp;lt;Impress&amp;gt;&amp;lt;RMK&amp;gt;&amp;lt;SUQQU&amp;gt;&amp;lt;THREE&amp;gt;&amp;lt;SNP&amp;gt;&amp;lt;THE FACE SHOP&amp;gt; 등 국내외 유명 화장품을 롯데·신라 등 대부분의 면세점과 &amp;lt;롯데백화점&amp;gt;에 입점시켜 유통하고 있다. 본사는 서울 양평동에 있고, 전국 각지에 50여 개의 매장이 있다. 약 300명(현장 직원 포함)에 달하는 직원을 품은 중견 기업으로, 연매출 1,200억(2016년 기준) 원에 달한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가 거쳤던 젊은 시절은 어떠했을까.&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대학시절을 포함해 20대는 모두 시험을 준비하며 보냈어요. 행정고시에서 입사시험으로 넘어갔죠. 지금 취업이 어렵다고 하지만 그때도 취업난이 대단했어요. 지금처럼 다양한 재능을 인정하는 시대도 아니었죠.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공채시험뿐이었어요. 20대 내내 시험 준비로 바빴어요. 갖은 노력 끝에 엘지화학에 입사했죠.”&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4/0104948/aas2.jpg&quot; style=&quot;text-align: justify; max-width: 10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그는 엘지생활건강 화장품 사업부 창립멤버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국내 화장품 업계는 아모레, 쥬단학(한국화장품), 쥬리아 등이 경쟁하고 있었다. 대기업이긴 했지만 화장품 사업 분야에서 엘지는 후발주자였다.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던 것은 당연할 터. 그의 말에 따르면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업계에 자리를 잡아갔다. 현재 엘지생활건강은 화장품은 물론 생활용품부문, 음료부문으로 나뉠 정도로 성장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엘지에 들어가서 정말 노력 많이 했어요. 다들 명문대 출신이었거든요. 그들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는 건 무얼까. 10배는 더 노력했어요. 내게 맡겨진 그 무엇도 허투루 하지 않았어요. 스트레스도 엄청 받았지만 포기하지 않았죠. 살아남고 싶었으니까. 아마 우리 후배들은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잘 될 거예요. 생존하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해요. 입사하면 같은 출발선에 선 거예요. 콤플렉스에 휘둘리지 말고 정신 바짝 차리고 노력해야 해요.”&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열심히 공부해서 대기업에 입사했고, 20년간 청춘을 바쳐 일했다. 전투적으로 일했고, 엘지생활건강 영업부문장 자리까지 올랐다.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동기들보다 더 빨리 승진하기 위해 잠을 줄여가며 하루하루 노력했다. 그렇게 얻은 달콤한 열매가 막 손에 들어오던 차, 그는 ‘내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하루도 마음 편한 날 없던 회사생활 중 가장 보람을 만끽할 위치에 올랐을 때 그만두기로 한 것이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원하는 기업에 입사하면 끝이라고요? 그 순간부터 더 치열한 경쟁이 시작됩니다. 엘지는 내게 최고의 회사였어요. 내 인생의 토대를 그곳에서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하지만 1997년 IMF가 휘몰아치면서 평생고용이라는 개념이 사라졌어요.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하루아침에 퇴사하는 걸 보며 나를 지킬 건 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내 일을 찾은 동기가 됐죠.”&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4/0104948/asda2.jpg&quot; style=&quot;margin: 0px 0px 10px 10px; text-align: justify; float: right; max-width: 100%;&quot; /&gt;&lt;strong&gt;인생 2막, 화장품 유통 전문 회사 CEO&lt;/strong&gt;&lt;br /&gt;
한 회사에서 이십여 년 동안 일하며 ‘화장품 업계’ 전문가가 된 그는 인생 2막을 ‘화장품’과 함께 하겠다고 결심했다. 엘지에서 영업부문장이 될 때까지 다양한 업무를 했기에 자신 있었다.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지만, 초창기 몇 해 동안은 수익이 전혀 없었다. 회사 창립 후 두세 번의 큰 고비가 이어졌다. 사회생활로 단련한 뚝심으로 버티며 (주)KNBCOS는 점점 자리를 잡아갔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벌써 15년 전이네요. 2003년 창업할 때 두 가지를 포인트로 잡았어요. 화장품, 그리고 면세점 채널.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엘지는 나를 만들어준 어머니 같은 회사에요. 지금도 회사 사람들, 후배들과 돈독하게 지내고 있어요. 또 엘지는 내가 여기까지 사업을 끌어오는 버팀목이 되어주었죠. 내 회사도 성장하고 있어 기쁘지만, 내 청춘을 쏟아 부은 엘지가 화장품으로 성공한 것 역시 기쁩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진입 장벽이 높은 면세점 채널을 선택한 건 ‘희소성’ 때문이었다. 면세점 유치를 위해 대기업들이 사활을 거는 것도 같은 이유다. 물론, 수익이 좋은 반면 위험도 큰 사업이다. 면세점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좋은 위치와 명품 브랜드가 필수 조건이다. 인테리어와 편의시설 등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국내 허가 기간은 5년에 불과해 리스크가 크다. 그럼에도 면세점 화장품 시장은 매년 상승곡성을 그리며 성장하고 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우리나라 면세점은 다양한 상품을 갖추고 있어요. 세계 어디에도 이런 나라가 드물죠. 게다가 가격 경쟁력까지 있으니 매출이 올라갈 수 밖에 없어요.”&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주은규 대표의 구상이 사업적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한 건 일본 화장품 브랜드 &amp;lt;가네보&amp;gt;를 한국 면세점에 진출시키면서 부터다. 한국 면세점에 &amp;lt;가네보&amp;gt;가 론칭하기 전이었다. 이 브랜드라면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 예상이 맞아 떨어졌다. 그렇게 하나 둘 브랜드와 입점 면세점이 늘어갔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그는 “브랜드 파워가 강하면 국경은 없어진다”며 “일본 화장품 브랜드 중 차근차근 성장한 것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고 말했다. 환갑이 지난 나이지만, 그는 지금도 여전히 중국과 일본을 드나들며 현장 분위기를 파악한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strong&gt;“창업 원하는 후배들, 중국이나 일본에서 도전해 보길! 언어와 그 나라의 문화를 잘 안다면 승산있다고 봐요.”&lt;/strong&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img src=&quot;//wfile.kookmin.ac.kr/data/board/0080/a2/q4/0104948/asdada.jpg&quot; style=&quot;text-align: justify; max-width: 10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앞으로 아시아 한·중·일은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일 거예요. 창업을 원하는 후배들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도전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물론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익히는 것이 먼저겠죠. 나 역시 일본에 현지법인을 만들어서 그곳에서 사업할 계획이 있어요. 우리나라 백화점이 외국 곳곳에서 선전하길 바랍니다. 그곳의 백화점은 유통은 물론 ‘대한민국’을 알리는 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거든요. 후배들에게 겉으로 나타나는 것만 보지 말고, 그 안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파악하려 노력하라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결론은 직접 몸으로 부딪히라는 겁니다.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될 때까지 부딪히길 바랍니다. 그런 과정들이 결국은 각자의 인생을 만들어 가니까요. 머리로만 될까 안 될까, 고민하고 결정하지 말고 일단은 부딪혀 보라는 얘기에요. 나는 지금도 하고 싶은 게 많아요. 끊임없이 생각하고 움직이죠. 나보다 훨씬 젊은 우리 후배들은 더 적극적으로 개척하기 바랍니다!”&lt;/p&gt;

&lt;div&gt;&amp;nbsp;&lt;/div&gt;
</description>
            <author>박차현</author>
            <pubDate>Thu, 01 Jan 1970 09:00:00 +0900</pubDate>
        </item>
        <item>
            <title>동문 CEO - 이니플래닝 김경희 대표를 만나다 / 의상학과 80학번</title>
            <link>1066090</link>
            <description>&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wfile.kookmin.ac.kr/data/board/0080/2015/02/54e2de89e5b1d.jpg&quot; style=&quot;max-width: 100%;&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디자이너들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사무실 가득 걸려 있는 옷들과 낡은 줄자들이 이곳이 프로의 세계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했다. 이니플래닝 김경희 대표는 국민대학교 의상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LG패션, ㈜쌍방울, ㈜한섬 등을 거쳐 지금의 이니플래닝을 창업했다. 올해로 13주년을 맞은 이니플래닝은 ‘리안뉴욕’, ‘엘르’ 등 여성복 브랜드로 유명한 중견 의류기업이다. 김 대표의 야무진 인상과 정돈돼 보이는 스타일에서 패션업계의 오너다운 포스가 느껴졌다. “회사를 선택할 때는 ‘어떤 브랜드’가 아니라, ‘어떤 소비자와 소통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세요. 그리고 항상 나 자신이 브랜드라는 걸 잊지 마세요.” 이날 김 대표는 “회사를 다니는 것이나, 한 회사를 운영하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며, “후배들이 ‘좋은 태도’를 갖추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30여 년간 패션디자이너로서 삶을 우직하게 걷고 있는 이니플래닝 김경희 대표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이니플래닝은 대표 브랜드인 ‘리안뉴욕’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중견기업으로 알고있습니다. 자세한 소개를 해주신다면?&lt;/strong&gt;&lt;/p&gt;

&lt;p&gt;리안뉴욕은 건강한 가치관을 가진 소비자와 건강하게 소통하는 브랜드에요. 혹시 150만 원짜리 코트를 사 입을 수 있으세요? 80만 원짜리도 잘 안 사 입으시죠? 저는 음식 장사를 해도 6~7천원짜리의 음식을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만들어 전달할까를 고민할 것 같아요. 옷도 그래요. 리안뉴욕은 건강한 제품을 건강한 가격에 제공해서, 건강한 가치관을 가진 소비자들과 공유하고 싶어서 만든 브랜드에요. 한마디로 ‘고객에게 위로를 받자’는 게 저희 브랜드 모토인데, 구체적으로는 ‘의문형 브랜드를 만들자’는 게 리안의 마인드에요. ‘어떻게 이런 가격으로, 이런 품질의 디자인을 만들었을까’ 하고 소비자들이 감탄하며 행복하게 만들자는 거죠.&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리안뉴욕이 어느덧 브랜드 출범 13년 차에 접어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창업 당시 목표를 얼마나 이뤄내셨나요?&lt;/strong&gt;&lt;/p&gt;

&lt;p&gt;개인적으로 혈연•지연•학연을 절대 배제한 투명하고 건강한 회사를 만들고 싶었어요. 부도덕한 회사, 오너가 투명하지 않은 회사에서 일하는 건 스스로의 존엄이 깨진다고 생각하거든요. 연봉 100억을 받는다고 해도 말이죠. 회사는 내가 열심히 일하고 꿈 꾸는 시간이 낭비되지 않는 곳이어야 해요. 이런 생각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저희 회사 직원들은 한번 들어오면 나갈 생각을 안 해요(웃음). 특히 매장 식구 대부분이 런칭 멤버들인데, 본인들이 매장에서 활동할 수 없는 나이가 되면 물류에 가서라도 일을 하겠다고 해요. 둘째는 브랜드 가치가 사회에 환원될 수 있는 회사를 만들고 싶었어요. 이 부분은 앞에서 말씀 드린 ‘소비자와의 건강한 소통’과 일맥상통하고요. 회사를 만들 때는 이 회사를 어떻게 끝낼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운영 과정이 너무 험난해져요. 제 경우는 ‘5년 차에 사옥을 사겠다’, ‘7년 차에 물류센터를 건립하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그대로 다 이뤄왔어요. 무작정 매출 몇 억? 그게 목표가 될 수는 없다는 얘기예요.&lt;br /&gt;
&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wfile.kookmin.ac.kr/data/board/0080/2015/02/54e2deb03708a.jpg&quot; style=&quot;max-width: 100%;&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원래 꿈이 패션디자이너였나요? 방송국 활동도 굉장히 열심히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lt;/strong&gt;&lt;/p&gt;

&lt;p&gt;대학 들어올 때 의상학과와 신문방송학과를 두고 고민했어요. 어렸을 때 꿈이 아나운서였거든요(웃음). 그래서 의상학과를 다니면서 국민대학교 교내 방송국 활동을 했어요.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저희 때는 방송국, 학보사(국민대 신문사), 영자신문사 중에 방송국이 제일 기강이 셌어요. 본래 방송국 활동을 하면 학교가 아니라 방송국을 다닌다고 할 정도로 일이 많은데, 저는 살금살금 학점 관리를 해서 동기들한테 욕을 많이 먹었어요(웃음). 과대표도 3년간 했었는데, 그때는 어떤 권익이 올까 봐 그걸 경계하려는 차원에서 교수님 방에도 절대 들어가지 않고, 교수님과 어떤 사담도 하지 않겠다는 규칙을 세웠어요. 학교를 열심히 다니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틈틈이 학점관리를 해서 수석졸업을 했고요.&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대학에서 처음 디자인했던 옷이 기억나시나요? 실제로 입고 다니기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lt;/strong&gt;&lt;/p&gt;

&lt;p&gt;‘패션은 자기소개서’라는 광고 카피가 있었어요. 광고 카피만큼 시대를 잘 조명하는 문구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패션도 그래요. LG패션 면접을 갔을 때도 그렇고 저는 평소에 직접 만든 옷을 자주 입고 다녔어요. 잘 입었다, 못 입었다가 아니라 나를 어떻게 표현할까를 고민했던 것 같아요. 또 그때는 유럽에서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유행이 들어왔는데, 그 기간이 2년 정도 걸렸어요. 외국으로 출장을 가지 않으면 유행이 흡수되기 어려운 시대였죠.&lt;/p&gt;

&lt;p&gt;그런데 유행이라는 게 참 작위적이에요. ‘블랙이 유행이네?’ 하면 모든 브랜드가 블랙을 내놓잖아요. 만일 작년에 그레이가 유행하면 소비자들이 올해 또 그레이를 사지는 않을 거예요. 그래서 매년 유행하는 컬러를 바꿔 내놓는 거고요. 우리가 옷장에서 옷을 치우는 시간이 보통 5년 주기로 돌아가요. 요즘 최고의 컬쳐코드는 ‘eclecticism’ 절충주의가 아닐까 해요. 그리고 패션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패션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고요. 저는 그때도 지금도 스포티브, 모던, 여성성이 적절하게 섞여 있는 패션을 선호하는 편입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wfile.kookmin.ac.kr/data/board/0080/2015/02/54e2dececa400.jpg&quot; style=&quot;max-width: 100%;&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남성중심의 문화였던 그 시절, 여성들에게 차별적인 부분이 존재했을 듯합니다. 일을 하면서 그런 문제에 부딪힌 적은 없으셨나요?&lt;/strong&gt;&lt;/p&gt;

&lt;p&gt;저는 제약이 있어서 뭔가를 못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 문제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어요. 제도권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죠. 인정하고 출발하면 50보 앞에서 시작하는 거고, 부정하면 50보 뒤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저는 MD마인드인데, 제가 회사를 운영할 수 있는 이유도 그런 점 때문이 아닐까 해요. 패션업계는 남자 경영자가 대부분인데, 성별을 떠나서 옷은 기획실 디자이너의 머리에서 출발하잖아요. 때문에 편견이나 벽에 부딪힐 일은 없다고 봐요.&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패션계 여성 경영인으로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lt;/strong&gt;&lt;/p&gt;

&lt;p&gt;제가 첫 회사를 10년, 두 번째 회사를 7년 다녔는데, 우리나라에는 장기간 회사를 다닌 패션디자이너가 많지 않아요. 나라를 대표할 만한 패션디자이너가 없다는 사실도 이직이 상당 부분 원인으로 자리할 거고요. 내 장점과, 소비자의 생각, 트렌드가 잘 융•복합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려요. 패션뿐 아니라 모든 직업이 마찬가지고요. 시간이 주는 역사가 있잖아요. 그런데 대부분의 패션디자이너들이 회사를 2~3년 정도 다니다 그만둬요. 제가 창업을 수월하게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도 한 회사에서 오래 근무했던 게 아닐까 해요. 한 회사를 오래 다닌 만큼, 자기 사업도 쉽게 포기하지는 않겠구나 하는 믿음을 주었던 것 같아요.&lt;/p&gt;

&lt;p&gt;따지고 보면 사업과 직장생활은 큰 차이가 없어요. 평소에 지닌 태도가 자신의 가치를 결정짓는 거니까요. 연봉을 올리거나 이직을 하는 것도 그간의 내 태도와 성과가 인정받느냐 못 받느냐의 문제라고 봐요.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내 행동 자체가 내 브랜드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후배들이 그걸 명심했으면 하고요.&lt;br /&gt;
&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wfile.kookmin.ac.kr/data/board/0080/2015/02/54e2dee883502.jpg&quot; style=&quot;max-width: 100%;&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디자이너로서 대표님이 이뤄내신 것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성과는 무엇인가요?&lt;/strong&gt;&lt;/p&gt;

&lt;p&gt;제가 학교를 다닐 때 저희 건물 바로 위에 건축학과가 있었어요. 건축물은 한번 지으면 백 년도 가잖아요? 저도 그런 브랜드를 만드는 게 꿈이에요. 회사생활 하면서 만든 브랜드 중 건재하는 브랜드들이 몇 개 있는데, 제가 세상에 내놓은 브랜드가 오래오래 사랑받는 것만큼 좋은 일은 없는 것 같아요.&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이니플래닝에는 모두 몇 개의 브랜드가 있나요? 또 해외로도 사업을 확장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설명해주신다면?&lt;/strong&gt;&lt;/p&gt;

&lt;p&gt;브랜드는 리안뉴욕, 엘르, 팝스에비뉴, 티플레닛 이렇게 4개가 있어요. 팝스에비뉴는 테스트 중인 편집매장이고, 엘르는 해외진출에 속도를 내려고 인수하게 됐어요. 리안뉴욕은 북경에 6~7개 정도 매장이 있는데 파트너를 찾는 게 힘들어요. 선택의 여지없이 반드시 해야 하는 사업이 중국 진출이에요. 중국을 경상도 정도로 생각해야 국익에 도움을 줄 수 있거든요. 리안뉴욕은 20대 초반 대상의 브랜드인데 일주일 동안 계속 입어도 티 안 나는 옷을 만들려고 해요(웃음). 엘르는 30대, 팝스에비뉴는 지역 밀착형 편집매장, 티플레닛은 차, 액세서리, 옷을 함께 판매하는 매장이에요.&lt;/p&gt;

&lt;p&gt;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진출한 브랜드만 백 개가 넘는다고 해요. 그런데 그 중에 잘 된 브랜드는 몇 안돼요. 단순히 회사를 키우겠다, 돈을 벌겠다는 목적만 가지고 있어서 그럴 거예요. 모 브랜드가가 중국에서 성공한 이유가 사업 마인드를 ‘소비자 행복’에 맞췄기 때문이에요. 모 브랜드가 중국에서 성공한 이유가 사업 마인드를 ‘소비자 행복’에 맞췄기 때문이에요. 그곳은 한국보다 중국 매출이 더 많은 회사예요.&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이니플래닝만의 독특한 회사 문화가 있다면?&lt;/strong&gt;&lt;/p&gt;

&lt;p&gt;저희 회사는 직원들이 다 같이 공부를 해요. 최근에는 《노자》를 공부하고 있어요. 작년에는 1년 동안 세계사 선생님이 오셨고, 그전에는 미술사, 중국어, 한문을 공부했어요. 실제로 시험도 보고요(웃음). 공부할 때는 아주 무섭게 시켜요.&lt;/p&gt;

&lt;p&gt;패션은 미술이 아니라 인문학에 더 가까워요. 모든 직업이 그렇다고 생각하고요. 어떤 사람은 음식으로, 어떤 사람은 글로, 어떤 사람은 옷으로 표현할 뿐이죠. 예를 들어, ‘놈코어’라는 말은 ‘노멀’과 ‘하드코어’가 합해진 말인데, 이건 패션뿐 아니라 사회의 전반적인 의식을 반영해요. 예전에는 알이 큰 액세서리를 즐겼다면, 지금은 오히려 그런 화려함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의미에요. 그림을 잘 그리거나 봉제를 잘하는 건 기술의 문제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세상에 대한 관심’이에요. 디자이너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 모두가 디자인에 반영되거든요. 소통을 잘하는 사람이 좋은 옷을 만들 수 있고요.&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wfile.kookmin.ac.kr/data/board/0080/2015/02/54e2df015c1e4.jpg&quot; style=&quot;max-width: 100%;&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회사 사훈이 있다면?&lt;/strong&gt;&lt;/p&gt;

&lt;p&gt;‘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매일 사훈이 바뀐다고 보시면 돼요. 오늘의 최선이 내일의 최선이 아니라는 거죠. 세종대왕이 ‘최선이다’라고 안 하고 ‘최선을 다하자’라고 말씀하신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성공을 미래형으로 물어보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 사람 성공했어?’ 이렇게 과거형으로 물어요. 지금부터 5~6시간을 어떻게 쓰느냐가 내일의 성공을 담보할 뿐이에요. 오늘 놀면 당연히 내일은 성공할 수가 없죠.&lt;/p&gt;

&lt;p&gt;이건희 회장의 아버님이신 이병철 회장님이 남긴 유언이 ‘경청’ 하나였다고 하죠? 저는 하루에도 수십 번 느낌표와 물음표가 생겨요. 퀵 아저씨를 봐도, 식당 주인을 봐도, 부모님, 남편, 아이에게도, 직원들을 보면서도 배우는 게 많아요. 사실 ‘아’ 하고 느끼는 사람만이 자기 것을 얻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매일 사훈이 바뀐다고 생각하고요. 제가 여성 경영인으로서 버틸 수 있는 힘도 ‘경청’하려는 태도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고요. 시크한 자세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어요.&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패션회사의 경영인으로서 최근 트렌드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신다면?&lt;/strong&gt;&lt;/p&gt;

&lt;p&gt;2020년이 되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구의 85%가 지표면의 2%에 해당하는 도시에서 살게 된다고 해요. 그런 면에서 제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고민이 해소되지 않고 있는데, 그래서 이 일을 그만두게 되면 환경과 관련한 일을 하려고 해요. 요즘 SPA 브랜드를 보면 ‘니즈’의 시대가 아니라 ‘원트’의 시대라고 하잖아요. 옷을 필요해서 사는 게 아니라 갖고 싶어서 산다는 거죠. 영국에서 수거한 옷 중에는 라벨도 떼지 않은 옷들이 엄청 많다고 해요. 이는 비단 영국의 문제만도 아니고요. 패션업계 경영자로서 굉장한 딜레마에요. 소비를 창출해야 하는 건 분명한데, 그에 비례해 생기는 피해가 크니 고민이죠.&lt;/p&gt;

&lt;p&gt;800년 후쯤에는 지구를 떠나야 한다는 말도 있는데, 조금이라도 그 기간을 연장시키려면 물도 아껴 쓰고 환경오염을 막아야 해요. 그래서 저는 화장실에 큰 통을 두고 사용하고 난 깨끗한 물은 보관했다가 화장실 물을 내려요. 교과서적인 이야기 같지만, 일본에서는 초등학생들이 1년에 48시간을 ‘환경지킴이’ 활동을 한다고 해요. 업체들을 방문해서 온도는 잘 지키고 있는지, 쓰레기 분리수거는 제대로 하고 있는지 검사를 하는 거예요. 아무래도 애들이 보니까 어른들이 안 지킬 수 없잖아요. 저희 나라도 그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염색할 때 물이 많이 사용되는 빨간색이 유행한다고 하면 이제는 ‘대구에서 지금 얼마나 많은 물을 쓰고 있을까?’ 하는 고민이 생겨요.&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wfile.kookmin.ac.kr/data/board/0080/2015/02/54e2e0ef80f88.jpg&quot; style=&quot;max-width: 100%;&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동물보호에 관심이 많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가요?&lt;/strong&gt;&lt;/p&gt;

&lt;p&gt;얼마 전에는 직원들 하고 동영상을 하나 봤어요. 오리털 생산 현장을 담은 영상이었는데, 살아 있는 오리의 털을 뽑고 상처가 나면 그 자리에서 바로 꿰매더라고요. 끔찍하죠? 그런데 더 끔찍한 건 3개월 뒤에 털이 다시 자라면 또 뽑히고, 또 뽑혀요. 그렇게 2년 동안 고통받은 뒤에는 고기가 되고요. 때문에 오리들이 자학을 하고 병들어 죽는 일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굉장히 비인도적이죠? 그래서 저희는 가능하면 오리털을 줄이거나 안쓰려고 해요. 사실 우리나라는 오리털이 필요할 정도로 춥지 않거든요. 원래 덕다운은 캐나다 산악구조원들이 입는 옷이에요. 그래서 이번에 개발된 신소재로 덕다운을 대체하고 있어요. 햇볕을 쬐면 17도가 더 따뜻해지는 소재예요. 또 모피는 중국에서 생산되는데, 우리나라가 최대 수입국이라고 해요. 외국에서는 모피 풀스킨을 입고 다니는 것을 굉장히 혐오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변화되는 단계예요. 그래도 요즘은 동물보호에 관심이 많아져서 곧 나아지지 않을까 해요. 저희 회사도 최근에 동물협회 브로셔를 5천~1만부 정도 제작해서 지원하고 있어요. 내가 아끼는 물이, 내가 지금 지키는 것이 우리 자녀들, 후손들한테 조금이나마 피해를 덜 줄것이라고 생각해요.&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후배 디자이너 육성을 위해 지난해 10월 국민대학교 의상학과 선배들이 졸업패션쇼를 심사하고, 멘토로도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후배들의 작품을 심사하신 소감을 말씀해주신다면?&lt;/strong&gt;&lt;/p&gt;

&lt;p&gt;제가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주관하는 ‘대한민국패션대전’에서 1984년, 85년 2회 연속 수상을 했어요. 그래서 꽤 오랫동안 심사를 맡았는데, 매번 느끼는 거지만 작품은 결과물만 봐서는 몰라요. 혹시 &amp;lt;프로젝트 런웨이&amp;gt;라는 방송프로그램을 보셨는지 모르지만, 디자인은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해요. 과정을 보면 디자이너가 ‘어떤 발상, 어떤 컨셉, 어떤 노력으로 이런 결과물을 만들었구나’를 알게 되거든요. 그런데 대부분의 심사가 과정이 아닌 결과 중심이라 아쉬울 때가 많아요. 그래서 이번 졸업패션쇼에서는 졸업생들이 심사를 하고 저희는 학생들의 열정에 대한 부분을 많이 봤어요. 제가 1984년에 졸업을 했는데, ‘그때 나라면 저렇게 할 수 있었을까?’ 할 정도로 디자인이 무척 감각적이더라고요. 동문회에서 4명 정도 시상을 했는데, 웨어러블 트렌드를 반영한 작품들도 인상적이었고, 창의적인 작품들도 굉장히 많았어요. 의상학과는 ‘국홍서’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국민대, 홍대, 서울대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그중에서 감각적인 면은 국민대가 단연 최고가 아닐까 합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대학을 졸업할 즈음 누구나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합니다.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lt;/strong&gt;&lt;/p&gt;

&lt;p&gt;졸업을 앞두면 취업을 할지, 유학을 갈지, 공부를 계속 할지 고민할 거예요. 제 개인적으로는 후배들이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으면 해요. 한국에서 한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비즈니스를 하려면 소비자 마음을 읽는 것이 제일 중요해요. 직접 일을 해보면서 자기만의 커리어를 쌓았으면 해요. 잡지를 보고 좋은 영감을 얻을 순 없어요. 지금 세대들의 예측수명은 120세잖아요? 일단 졸업했으면 현장에서 뛰어보고 거기서 또 자기만의 것을 찾으면 돼요. 경험을 쌓고 난 뒤 공부를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lt;/p&gt;

&lt;p&gt;지난 12월 16일에 저희 동문회가 멘토링 콘서트를 열었었어요. 졸업한 선배들이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멘토가 되는 콘서트였는데, 유통, 원단, 침장 디자이너, CEO, 디스플레이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중인 선배들이 참여했어요. 패션디자인도 분야가 굉장히 다양하거든요. 한 명의 멘토에게 5명의 멘티가 연결되었는데, 후배들을 키워서 취업도 시키고 졸업 후 가이드라인을 주기도 해요. 그게 최선은 아니겠지만, 졸업한 선배들을 개인적으로 만나기는 힘드니까 이왕이면 동문모임을 할 때 후배들한테 뭔가 기여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었어요.&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wfile.kookmin.ac.kr/data/board/0080/2015/02/54e2e10f1608f.jpg&quot; style=&quot;max-width: 100%;&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디자이너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소양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lt;/strong&gt;&lt;/p&gt;

&lt;p&gt;세상에 대한 관심? 흐름을 파악하는 거죠. 그래서 신문을 보는 게 중요해요. 세계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가 어딘 줄 아세요? 도쿄에요. 그곳에는 8층짜리 명품 브랜드 건물이 있는데, 사람들이 ‘우리나라는 왜 3층밖에 안 되느냐’고 해요. 우리나라는 서울에 사는 인구가 1천6백만 명 정도니까 3층이면 충분해요. 도쿄에는 3천3백만의 인구가 살거든요.&lt;/p&gt;

&lt;p&gt;사회적 배경 없이 디자인을, 비즈니스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디자이너라면 지금 이 현상이 왜 나타나고 있을까를 고민할 필요가 있어요. 그 뿌리를 알아야 트렌드의 근본을 이해하게 되거든요. 세계사를 공부할 때 알게 된 사실인데, 아시아에 인구가 많은 이유가 ‘쌀’ 때문이라고 해요. 쌀이 밀보다 결과물이 많아서 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고, 그 결과 수천년이 지나 아시아 인구가 많아진 거죠. 지중해에 철학자가 많은 것도 비슷한 맥락이에요. 그곳은 날씨가 좋아서 밭에 씨만 뿌려두면 할 일이 없대요. 그래서 남는 시간 동안 생각하고 연구하다 보니 철학자가 많이 탄생하는 거죠(웃음). 우리나라가 빨리빨리 문화를 갖고 있는 것도 나쁘게만 볼 게 아니에요. 우리나라는 땅이 좁고 한번 농사를 잘못 지으면 보릿고개를 넘어야 하니까 뭐든 빨리빨리 하려는 습관이 생긴 거예요. 《한국인의 의식구조》라는 책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비즈니스를 할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에요.&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인생 선배로서 국민대학교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lt;/strong&gt;&lt;/p&gt;

&lt;p&gt;한 방송프로그램에서 ‘능력이 있는 사람’과 ‘태도가 좋은 사람’ 중에 어떤 인재를 선호하느냐는 조사를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99%가 후자를 택했다고 해요. 저도 비슷해요. 학교 다닐 때 뭔가를 맡는 건 굉장히 귀찮은 일인데, 그런 활동을 했던 친구들이 대부분 주변을 밝게 하고 기쁨을 주는 성향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많은 취업준비생들이 포트폴리오만 열심히 준비해요. 하지만 저는 사회에 대한 관점, 직장에 대한 관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또 면접을 보러 오면서 우리 회사 규모나 매장 수도 모르고 오는 친구들은 반드시 떨어뜨려요. 그건 열의가 없는 거거든요.&lt;/p&gt;

&lt;p&gt;인상학을 하는 분이 있는데, 그분은 사람을 볼 때 피부를 제일 먼저 본다고 해요. 그 사람 피부를 보면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고요. 이 사람이 어떤 라이프스타일,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피부가 달라진대요. 예를 들어, 다크써클이 심하거나 피부에 뭐가 막 나면 자기 절제가 안되고 무책임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죠. 어떤 회사는 담배를 피우면 입사가 안 되는데, 매년 건강검진을 해서 니코틴이 나오면 퇴사처리를 해요. 건강도 삶에 대한 태도도 다 자기선택이에요. 몸과 정신에 나쁜 것을 선택하면서 내가 건강하길 바라는 건 안 되는 거죠. 제가 아프면 직원들한테 민폐에요. 그래서 저는 몸에 나쁜 것은 절대 하지 않아요. 제 의무는 우리 회사를 선택한 직원들이 자기선택이 옳았다는 걸 매일 증명해야 하는 거잖아요. 오늘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나라는 브랜드도, 내가 만든 옷도 달라진다는 걸 꼭 기억하세요.&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right;&quot;&gt;&lt;strong&gt;김경희&lt;/strong&gt;&lt;br /&gt;
1984, 국민대학교 의상학과 수석졸업&lt;br /&gt;
1984. 10. 대한민국 패션디자인 경진대회 가작 수상&lt;br /&gt;
1985. 10. 대한민국 패션디자인 경진대회 가작 수상&lt;br /&gt;
1983~1990 LG패션 숙녀복 근무&lt;br /&gt;
1991~1996 ㈜쌍방울(키이스, TWOc 디자인실장 역임)&lt;br /&gt;
1991. 8. 키이스 런칭&lt;br /&gt;
1996. 이화여자대학원 졸업&lt;br /&gt;
1997. ㈜한섬 (마인디자인 이사 역임)&lt;br /&gt;
1998. 1. 린 런칭&lt;br /&gt;
1999. 1. 라인 런칭&lt;br /&gt;
2001. 11. ㈜이니플래닝 창립&lt;br /&gt;
2002. 1. 리안뉴욕 런칭&lt;br /&gt;
2005. 3. 한국패션브랜드대상 수상&lt;br /&gt;
2006. 4. 한국패션품질대상 수상&lt;br /&gt;
2007. 12. 롯데베스트브랜드 수상&lt;br /&gt;
2009. 엘르 여성복 출시&lt;br /&gt;
2013. 11. 팝스애비뉴 런칭&lt;br /&gt;
2014. 8. T.PLANET 출시&lt;/p&gt;

&lt;p style=&quot;text-align: right;&quot;&gt;&amp;nbsp;이화여대 디자인 특강&lt;br /&gt;
&amp;nbsp;동덕여대 숙녀복 디자인 특강&lt;br /&gt;
&amp;nbsp;숭의여대 겸임 교수&lt;/p&gt;
</description>
            <author>박차현</author>
            <pubDate>Thu, 01 Jan 1970 09:00:00 +0900</pubDate>
        </item>
        <item>
            <title>동문 CEO - 돌실나이 김남희 대표를 만나다 / 의상디자인학과 87학번</title>
            <link>1066089</link>
            <description>&lt;p&gt;&lt;img border=&quot;0&quot; src=&quot;http://wfile.kookmin.ac.kr/data/board/0080/2014/03/54b8e49f8ce83.jpg&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돌실나이 대표 김남희 동문은 5평이 채 안 되는 자그마한 공방에서 시작하여 20년여 만에 30개의 점포를 냈으며 매출액 100억 원 규모의 건실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돌실나이의 우리 옷은 상호 자체가 말해주듯 들에서 핀 꽃과 같이 여릿여릿한 질감과 은은한 빛깔로 화려하지 않고도 그윽한 멋이 우러난다. 본래 &amp;#39;돌실나이&amp;#39;는 전남 곡성의 석곡마을에서 나는 최상의 특산품인 삼베를 일컫는다. 그곳 &amp;#39;석곡에서 나는 실(돌실)&amp;#39;과 &amp;#39;짓다&amp;#39;라는 표현을 합쳐 &amp;#39;돌실나이&amp;#39;란 브랜드로 우리 옷 문화에 대한 전통을 만들고 이어가는 분들에 대한 경외감으로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바람이 담겨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전통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가는 사람이 되고자 화려한 것보다는 일상 속에서 입을 수 있는 소박하지만 수수함이 담긴 우리 옷의 아름다움을 생활 속으로 끌어오기 위해 오늘도 우리 옷 연구에 여념이 없는 국민대 의상디자인학과 87학번 김남희 동문의 우리 옷 이야기를 들어보자.&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border=&quot;0&quot; src=&quot;http://wfile.kookmin.ac.kr/data/board/0080/2014/03/54b8e49f9f38a.jpg&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생활 한복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사연이 있었나요?&lt;/strong&gt;&lt;br /&gt;
저는 의상디자인학과를 졸업했는데 사실 꼭 의상을 좋아서 들어간 건 아니었어요. 처음엔 들어가서 많이 방황했는데 학교 다니면서 &amp;#39;어떻게 생각할 것인가&amp;#39; 라는 철학 기초 인문 서적을 읽고 생각들을 많이 바꾸게 되었죠. 처음엔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철학 책들을 읽다가 &amp;#39;어떻게 살 것인가&amp;#39; 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어요. 고등학교 때까지 선생님이나 부모에게 &amp;#39;뭐가 될래, 뭘 할래?&amp;#39;가 인생의 목표였는데 정작 뭐가 되어야할지 잘 몰랐거든요. 그런데&amp;#39;어떤 자세로 살 것인가가 더 중요한 부분이구나. 꼭 굳이 뭐가되지 않아도 되는 거구나.&amp;#39; 라고 생각하면서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 된 것 같아요. 저는 기존에 아니라고 생각하던 무엇들과 싸워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고요. 그래서 &amp;#39;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amp;#39; 진지하게 고민하다 노동자들이 생산하는 곳에 직접 들어가 노동자운동을 직접 해보게되었어요. 이러한 운동이 사회 곳곳에 전반적인 건전한 생각을 가지고 건전하게 조직변화를 시킬 수 있는 그러한 전문인 운동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하면서 제가 배운 의상을 접목시켜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지 고민 했을 때 한복이라는 아이템을 떠올리게 된 거죠.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구체화하고 체계화시키고 싶어서 3학년 때부터 의상문화 연구회를 만들어서 공부를 시작했고요. 그 이후에 우리 입거리 연구회로 전환하면서 그전까지 패션쇼에 한복하면 계량한복이라 부르는 화려한 옷들을 만드는 게 보통이었는데 저는 노동복, 평상복, 외출복 그래서 우리전통 소재들을 찾아서 전통문양, 전통기법, 염색 이런 것들을 찾아서 아주 소박한 서민적인 생활 속에 우리 옷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시작을 했어요. 멋모르고 이래저래 공부하다보니 목표가 점점 명확해지는 거죠. 막 졸업을 해서 대기업에 취업 한다기보다 내 뜻과 맞는 곳을 찾아 많이 헤매면서 이런 운동들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없는가 찾다보니 마음에 맞는 동료들을 하나 둘 만나게 되고 함께 시작하게 됐죠.&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평범한 가정주부에서 이제는 연 76억의 매출을 올리는 생활 한복 업체를 이끄는 당찬 CEO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나요?&lt;/strong&gt;&lt;br /&gt;
처음엔 당연히 될 줄 몰랐죠. (웃음) 당시에는 회사라고 알아주지 않았던 생활문화연구소에 들어가 10개월 근무를 했어요. 그 당시에 집안 형편이 넉넉한 편도 아니고 우리 시대에는 딸이 돈도 안 벌고 밖으로 나간다는건 모진 구박 이였죠. 그러다가 아버지가 편찮으시게 되었고 4년 연애한 남자와 갑작스레 결혼을 했는데, 양쪽 집안에서 집안 살림이 아닌 외부에서 일하는 것을 이해받지 못했기 때문에 3년 시집살이를 하면서 꿈이 포기될 줄 알았어요. 하지만 제가 집에 있으면서 집에만 있을 수 있는 성격이 아니란 걸 알았고 한 번 생각한 것은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분가를 하고 옷과 관련한 스터디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계기로 지금의 돌실나이가 일어나게 된거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입거리 연구회 스터디를 하면서 &amp;#39;일단 만들어서 팔아보자. 그리고 직접 발로 뛰고 몸으로 부딪혀서 경험해 보자&amp;#39; 라고 생각하며 무모한 도전을 시작했어요. 많은 시행착오와 실험적인 도전으로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그 때 대학동기이자 스터디 멤버였던 정경아(의상디자인87) 친구가 그 당시의 힘듦을 참고 이겨내어 더 성장할 수 있게 해준 든든한 원동력이었어요. 이 친구가 없었으면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겁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대표님의 돌실나이 경영 철학이 궁금합니다. 돌실나이는 어떤 철학을 가지고 운영하고 있으신가요?&lt;/strong&gt;&lt;br /&gt;
돌실나이의 슬로건은 &quot;자연과 사람을 생각하는 돌실나이&quot;에요. 가끔 일을 하다보면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 일하는 건데, 일을 하기 위해 일을 하거나, 일에 의해 사람이 불행해질 때가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 회사에서는 옷을 만들던, 이 안에서 다른 일을 하던 서로가 사랑하고 존중하고 &amp;#39;사람이&amp;#39; 우선시 되는 그런 사회가 조직 내에서 실현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자연과 더불어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데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 주변환경을 많은 파괴하고 있는데 이런 현상을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 자연친화적인 옷 문화를 활성화하고 하려고 노력하는 거죠. 비슷한 예로 돌실나이는 사육한 짐승의 털을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간혹 일부 품목에서 트리밍으로 쓰는 몇 가지 옷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인조털로 옷들을 만들고 있어요.&lt;/p&gt;

&lt;p&gt;&lt;br /&gt;
&amp;nbsp;&lt;/p&gt;

&lt;p&gt;&lt;img border=&quot;0&quot; src=&quot;http://wfile.kookmin.ac.kr/data/board/0080/2014/03/54b8e49fb5acb.jpg&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우리 옷인데도 불구하고 한복은 대중화 되어 있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요, 이를 극복하기 위한 특별한 영업 전략이 있나요?&lt;/strong&gt;&lt;br /&gt;
우선 나부터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생활한복이 거품처럼 일어났을 때 또다시 특정한 날에만 입는 옷처럼 발전한 것을 다시 생활 속에서 입는 소박한 옷으로 끌어 오려고 했죠. 한복 디자인의 문턱을 낮추고 가격대도 다양화 시키고 매장의 인테리어와 디스플레이 방법을 바꿔서 사람들이 진입하기 친숙한 동선으로 바꾸는 노력을 했어요. 그러면서 우리만의 정서를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와 현대적이고 고급스럽다는 이미지를 접목시키고자 많은 개선을 했어요. 그 밖에도 세컨드 브랜드로 &amp;#39;아회&amp;#39;를 런칭하여 해외 패션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한복인들에게도 모두 주목을 받는 계기가 됐고요. 저는 고가 옷을 만드는 데 재미가 없어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특별한 날 입는 옷으로 특정 일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주 많은 사람에게 만만한 옷을 만드는 것이 꿈이거든요. 아회 활동으로 국가적으로 인정을 받아 이미지 개선을 시킨 것을 돌실나이 이미지로 옮겨 본격적으로 이미지를 바꾸고 2~3년 주기로 새로운 이미지를 도입하기 위해 매장 업그레이드를 시키기 위한 노력에 직접 나섰습니다. 그리고 저희와 함께 했던 사람들과 계약을 연장하면서 그 사람들의 지역엔 새 매장을 오픈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끝까지 지켰어요. 이 사람들과의 관계는 서로 보완하고 개선하고 애착을 갖고 사랑하면서 대리점과의 관계 대부분 10년이 넘은 것도 돌실나이의 특별한 영업 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돌실나이에서 만든 우리 옷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lt;/strong&gt;&lt;br /&gt;
돌실나이의 경쟁력은 일반 내셔널브랜드가 내는 것만큼이나 새로운 아이템을 많이 내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리고 사람들한테 괴리되는 옷을 만들지 않으려는 것 또한 굉장히 중요하죠. 여름에만 300종의 새로운 디자인을 출시하고, 봄~가을엔 150종 겨울에도 200종 안 쪽으로 새로운 상품 디자인을 연구하고 있어요. 이렇게 노력하는 만큼 회전력이 굉장히 빠른 덕분에 상품 경쟁력을 강화하여 고객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어요.&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김남희 대표님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요?&lt;/strong&gt;&lt;br /&gt;
돌실나이가 추구하는 목표는 딱 하나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 옷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옷을 입게 하기 위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옷을 만드는 사람들이 생겨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생활한복 업체들 간 선의의 경쟁들을 하며 발전하고&amp;nbsp; 대한민국에 우리만의 옷 문화가 있다는 우리의 정체성을 정확히 가질 수 있는 집단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내 분야에서 최선의 노력하고 있습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border=&quot;0&quot; src=&quot;http://wfile.kookmin.ac.kr/data/board/0080/2014/03/54b8e49fc7fc6.jpg&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br /&gt;
&lt;strong&gt;Q. 대표님이 돌실나이를 시작할 때 이루고자 했던 목표에 현재 얼마큼 도달 하셨다고 생각하시나요?&lt;/strong&gt;&lt;br /&gt;
저는 항상 제가 목표하는 것보다 더 이루고 있기 때문에 모르겠네요. 저는 처음부터 이 일로 먹고 살지 몰랐어요. 시작할 때는 제가 좋아하는 일이고 누군가 꼭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시작했는데 항상 제가 생각해 있는 것 보다 더 앞에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늘 감사하게 생각하죠. 저는 바로 앞에 닥친 일들에 최선을 다하고 앞에 목표를 어떻게 그 안에서 발전할 수 있는지 고민하면서 한 발의 목표만을 세우면서 지금까지 왔어요. 생활한복 돌실나이는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고 안정적이지만 돌실나이가 시작할 때와 비교했을 때 Silver target brand가 되었다는 게 조금은 아쉬워요. 이 점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젊은 친구들이 생활한복은 나이 들어서 입는 옷이라는 편견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브랜드의 신선한 이미지를 새롭게 추구하고 싶어요. 그래서 세운 새로운 목표는 젊은이들에게 우리 옷 우리문화를 그들에 감성에 맞는 옷을 만들어 편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세컨드 브랜드로 &amp;#39;꼬마크&amp;#39; 런칭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새 브랜드를 대박나자고 생각하지 않고 &amp;#39;어떻게 하면 망하지 않고 살아남을까. 실패하면 어떻게 극복하지&amp;#39;가 목표였어요. 남들이 포부가 크지 않다고 얘기할지 모르지만 닥친 거에 포기를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요. 어떻게 하면 잘 되게 할까 계속 고민하는 것이 답이죠.&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대학시절 기억에 남는 강의나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으신지요?&lt;/strong&gt;&lt;br /&gt;
제가 아마 의상디자인학과에서만 활동했었더라면 대학 생활이 특별한 의미가 없었을 거예요. 저는 당시에 조형대학 학생들끼리 만든 &amp;#39;그림사랑&amp;#39;이라는 동아리를 했었는데요. 처음에는 조형대 학생으로만 제한을 하다가 정서가 맞는 친구들과의 교류 3년 차부터는 다른 다양한 과 사람들이 새로 들어오면서 동아리가 번창했어요. 그림사랑 동아리를 통해서 처음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눈을 뜨게 되었고요. 우리 분야에서 그림을 통해 사회의 정서를 표현하고 지원하는 활동을 하는 게 즐거웠어요. 그리고 동아리 안에서 처음 만나 연애를 시작해서 4년 교재 후에 결혼에도 성공하였습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border=&quot;0&quot; src=&quot;http://wfile.kookmin.ac.kr/data/board/0080/2014/03/54b8e4a00eaf7.jpg&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후배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 어떤 능력을 배양해야 사회에서 당당히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조언을 해주세요. &lt;/strong&gt;&lt;br /&gt;
저는 많은 사람들이 자격증 따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요. 많이 아는 것은 도움은 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많이 아는 사람들이 정말 입만 발달해서 일을 진행할 때 크게 도움이 안되는 사람들이 많아요. 아는 게 많을수록 더 알려고 하지 실천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죠. 정말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알고 얼마나 많은 자격증을 따서 준비된 사람들이 졸업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목표한 바를 얼마나 잘 실천하여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것은 바로 근성을 키운다는 의미겠죠. 헝그리 정신을 키우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바닥에서부터 고생하면서 배우는 것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 내 앞에 다가온 첫 계단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첫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다보면 그 계단을 마지막에 다 오를 수 있는 건데, 그런 과정없이 마지막 계단으로 날아올라 앉으려 하는 것은 &amp;#39;허세&amp;#39;라고 생각해요. 단숨에 원하는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이라면 쉽게 무너질 수 있어요. 목표를 너무 높게 갖지 말고 당장 처한 목표에서 하나하나 최선을 다하다보면 언젠가 그 산을 다 오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무엇을 원하든지 조급하게 무엇인가 되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 창업을 준비하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세요.&lt;/strong&gt;&lt;br /&gt;
창업하는 사람들은 근성 자체가 남달라야한다고 생각해요. 창업을 하는 게 꼭 좋은 거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처음부터 창업 자체를 목표로 두기보다 본인의 근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보길 바라요. 모든 사람들이 전체를 보는 눈과 일을 주도적으로 만들어가는 능력들을 가지고 있어야 사회에서도 오래 버틸 수 있죠. 그러나 창업하는 사람들은 그 외에도 특별한 근성이 필요해요.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서 하려는 끈기와 그럴 때 몸을 사리지 않는 근성이 있어야 하죠. 보통 근성을 가진 사람은 되게 많지만 유지가 되지 않는 이유는 &amp;#39;허세&amp;#39;때문이라고 봐요. 내가 노력한 것보다 과하게 단숨에 쉽게 얻으려고 하는 허세 때문이죠. 저는 근성을 유지하기위한 방법으로 &amp;#39;될 때 된다는 소리를 절대 하지 말아야 하고, 안 될 때 안 된다는 소리를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amp;#39;는 생각을 갖고 사는 것이에요. 매출같이 눈에 보이는 남들에게 들어나는 것이 얼마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실익을 얼마나 가지고 있어야 되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죠. 그래서 돈은 버는 것보다 어떻게 관리하고 쓰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허세는 절대적으로 금물이고 어떤 것이든 쉽게 얻으려는 것도 절대적으로 금물이에요. 저의 인생의 원칙은 &amp;#39;대가를 반드시 치른다.&amp;#39;거든요. 무엇인가 가지려 하면 그거에 대가를 반드시 치른다. 그런데 내가 만약 대가를 다 치르지 않고 무엇인가 가졌다면 그 때부터 대가를 치른다.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공짜로 얻으려고 하면 안돼요.&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길이 없는 곳이라면 길을 만들어 걸어가는&amp;nbsp;돌실나이 대표 김남희 동문의&amp;nbsp;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니&amp;nbsp;지치지 않는 도전 정신과&amp;nbsp;끈기 그리고 허세를 부리지 않는 근성이 느껴졌다.&amp;nbsp;국민*인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마주하였을 때 새로운&amp;nbsp;도전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amp;nbsp;당당히 걸어가 보길 바란다.&amp;nbsp;다만 한 발 한 발 정성을 다해 꾸준히 걸어가며 그 한 발의 중요성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 우보천리(牛步千里)라는 옛 성인들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서두르지 말고&amp;nbsp;차근차근&amp;nbsp;스스로 성장시켜서&amp;nbsp;더욱 더 단단하고 강해지는 것일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border=&quot;0&quot; src=&quot;http://wfile.kookmin.ac.kr/data/board/0080/2014/03/54b8e4a020fe5.jpg&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description>
            <author>조영문</author>
            <pubDate>Thu, 01 Jan 1970 09:00:00 +0900</pubDate>
        </item>
        <item>
            <title>동문 CEO - (주)제일비엠시 김정현 대표를 만나다 / 법학과 73학번</title>
            <link>1066088</link>
            <description>&lt;p&gt;&lt;img border=&quot;0&quot; src=&quot;http://wfile.kookmin.ac.kr/data/board/0080/2014/02/54b8e49ec7c1b.jpg&quot; /&gt;&lt;/p&gt;

&lt;p&gt;2010년 &amp;#39;제일과 동행&amp;#39;이라는 장애인 표준 사업장을 설립, 취업 취약계층인 장애인을 고용해 나눔 경영을 실천해 온 동문이 있다. 법학과 73학번 김정현 동문이 그 주인공.&amp;nbsp; 그간 사회봉사의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11월, 우리학교 개교 67주년 기념식에서 동문 공로상을 받았다. &amp;#39;사람이 제일이다&amp;#39;라는 신념으로 자기만의 길을 가고 있는 김정현 동문을 만나봤다.&amp;nbsp;&lt;br /&gt;
&amp;nbsp;&lt;/p&gt;

&lt;table align=&quot;left&quot; border=&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gt;
	&lt;tbody&gt;
		&lt;tr&gt;
			&lt;td&gt;&lt;img border=&quot;0&quot; src=&quot;http://wfile.kookmin.ac.kr/data/board/0080/2014/02/54b8e49ef2b90.jpg&quot; /&gt;&lt;/td&gt;
			&lt;td width=&quot;10&quot;&gt;&amp;nbsp;&lt;/td&gt;
		&lt;/tr&gt;
		&lt;tr&gt;
			&lt;td colspan=&quot;2&quot; height=&quot;10&quot;&gt;&amp;nbsp;&lt;/td&gt;
		&lt;/tr&gt;
	&lt;/tbody&gt;
&lt;/table&gt;

&lt;p&gt;&lt;font size=&quot;3&quot;&gt;&lt;strong&gt;푸를 &amp;#39;청&amp;#39; 글월 &amp;#39;문&amp;#39;, &amp;#39;청문&amp;#39;의 시절들&lt;/strong&gt;&lt;/font&gt;&lt;/p&gt;

&lt;p&gt;인터뷰 날짜와 시간을 미리 정해 놓았는데도 동문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약속한 시간에 도착하고 나서 20여 분을 더 기다린 후에야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었다. 급한 결제를 마무리하고 왔다고 했다. 하지만 인터뷰를 시작한 지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외부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 나가야 한다는 연락이 왔다. 4개 사업체를 열정적으로 이끄는 기업의 수장다웠다. 그렇게 겨우 쪼갠 시간을 빌어 인터뷰가 성사됐다. 쉴 새 없이 울리는 카메라 셔터 소리는 날카롭게 시간을 자르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런 가운데서도 대화는 사뭇 진지했고 앞에 놓인 찻잔에선 녹차 향이 희미하게 올라왔다.&lt;/p&gt;

&lt;p&gt;김정현 동문은 안동의 면 단위 시골에서 태어났다. 한 학년에 한 반이 전부인 작은 초등학교를 다녔다. 모범생이기도 했고 집안의 기대도 받았다. 그래서 안동시의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내내 전교 1,2등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머잖아 인생의 첫 좌절을 맛봐야 했다.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것. 당시 일류대로 꼽히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lt;/p&gt;

&lt;p&gt;국민대 법학과에 진학한 후에도 쉽게 현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짧은 방황의 시절이었다. 법대생이었지만 사법고시를 치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당시의 사법고시는 1년에 몇 명 뽑지도 않았거니와, 산 속 절에 들어가 2,3년을 오롯이 바쳐야 겨우 합격할 수 있었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지 않느냐는, 제법 치기어린 패기도 있었다. 김동문은 대학을 무사히 졸업하고 좋은 회사에 입사하는 것이 대학 다닌 보람이라고 생각했다.&lt;/p&gt;

&lt;p&gt;그런 동문에게 전환점이 될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amp;#39;청문회&amp;#39;라는 동아리에 가입하게 된 것. &amp;#39;청문회&amp;#39;는 일종의 학술 동아리였다. 선후배들이 모여 사회 철학을 탐구하고 현실에 대해 고민했다. 강당을 빌려 학술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 했다. 동문은 동아리 활동을 통해 답답한 현실과 젊음의 탈출구를 찾았다. 그때 만난 동아리 선후배는 서로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됐다. 덕분에 학교에 정을 붙이고 전공과목에도 집중할 수 있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는 F학점을 열심히 메우고 과외 아르바이트도 했다. &amp;#39;청문회&amp;#39; 활동도 빠질 수 없었다. 이래저래 정신없이 졸업반이 됐다.&lt;/p&gt;

&lt;p&gt;동문은 지금의 나를 만든 과거의 결정적인 순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amp;#39;청문회&amp;#39; 활동을 했던 그때를 꼽았다.&amp;nbsp;&amp;nbsp; &quot;그 시절 저를 지탱해 준 것은 멘토 역할을 해준 동아리 동문들과 저를 따르는 후배들이었습니다. 그 동아리 선후배의 우정은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고 기업을 운영하고 사회 활동을 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동아리가 생겼다가 사라졌어도 청문회는 지금껏 명목을 유지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quot;&lt;/p&gt;

&lt;p&gt;&lt;img border=&quot;0&quot; src=&quot;http://wfile.kookmin.ac.kr/data/board/0080/2014/02/54b8e49f12d82.jpg&quot; /&gt;&lt;/p&gt;

&lt;p&gt;&lt;font size=&quot;3&quot;&gt;&lt;strong&gt;장애인에게 직업은 삶을 지키는 무기&lt;/strong&gt;&lt;/font&gt;&lt;br /&gt;
&amp;nbsp;&lt;br /&gt;
김정현 동문은 대학 졸업 후 삼성생명과 삼성화재 자산운용부문에서 부동산관련 업무를 하며 18년간 직장 생활을 했다. 후회 없이 열심히 일했다. 소위 일류대를 나온 동기들 보다 인정받고 싶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1998년 (주)제일비엠시를 창업했다. 인력을 채용, 계약을 맺은 기업에 이들을 파견하고 관리하는 인적자원 아웃소싱 전문회사다. 이를 모기업으로 현재 제일비에스(주), 제일에스피(주), (주) 제일과동행 등 모두 4개 법인으로 성장했다.&lt;/p&gt;

&lt;p&gt;&lt;br /&gt;
특히 (주)제일과 동행은 국내 16번째의 장애인 표준 사업장으로, 지적 장애인들을 고용,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는 회사다. 장애인에게 처음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quot;장애인 협회 쪽에 제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장애인 인권을 위해 애쓰는, 그쪽 방면으로는 유명한 교수입니다. 저는 기업인이니까, 주로 밥을 사러 다녔지요. 그러다 임원을 하라는 권유가 있어서 참여하게 됐습니다. 가볍게 생각하다 촉촉이 젖어든 경우죠.&quot;&lt;/p&gt;

&lt;p&gt;김동문은 장애인 공단과 장애인 표준사업장 MOU를 맺고 (주)제일과 동행을 창업했다. 사업장에는 현재 28명의 지적 장애인이 일하고 있다. 주로 단순 포장이나 전자제품 조립 등의 임가공업을 한다. 지적 장애인이다 보니, 생산성이 낮다. 하지만 법으로 정해진 최저임금을 지급해야 해서 매출을 보존하기가 쉽지 않았다. 장애인공단의 지원을 받고 있지만 사업 초기엔 힘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동문의 의지는 확고했다.&lt;/p&gt;

&lt;p&gt;&quot;장애인도 일을 해야 합니다. 일을 해야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습니다. 단순히 금전적인 도움이나 일시적인 혜택을 주는 것은 장애인들에게 도움이 안 됩니다.&quot;&lt;br /&gt;
시간이 지나자 서툴기만 하던 그들의 손에 속도가 붙었다. 작업에 숙련이 되어서 조금씩 매출이 오르고 있다. 앞으로는 조금 더 난이도 있는 작업을 통해 장애인들이 기술을 익힐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다. 기술자가 되면 장애인들도 스스로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다양한 일자리를 개발하는 등 여러 가지 구상을 하고 있다.&lt;/p&gt;

&lt;p&gt;2010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지적장애인 세계 축구대회 단장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몸은 성인이지만 지적 연령이 초등학생 수준 정도의 말과 행동을 하는 그들을 보니&amp;nbsp; 애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25일간의 일정을 내내 함께 했다. 같이 먹고, 자고, 세계 여러 나라 선수들과 시합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과 좀 더 가까워진 계기가 됐다.&lt;/p&gt;

&lt;p&gt;&lt;img border=&quot;0&quot; src=&quot;http://wfile.kookmin.ac.kr/data/board/0080/2014/02/54b8e49f271c7.jpg&quot; /&gt;&lt;/p&gt;

&lt;p&gt;&lt;font size=&quot;3&quot;&gt;&lt;strong&gt;다시 캠퍼스로 간다면 기타 동아리 활동하고파&lt;/strong&gt;&lt;/font&gt;&lt;br /&gt;
&amp;nbsp;&lt;br /&gt;
창업 초기부터 동문은 기업 이념으로 &amp;#39;사람이 제일이다&amp;#39;라는 자신의 평소 생각을 내세웠다. 기업의 이념과 개인의 이상을 일치시키기는 쉽지 않은 일. 어려움을 없었는지 물었다.&lt;br /&gt;
&quot;사업을 하다보면 회의가 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갑과 을의 관계에서 오는 인간적인 씁쓸함이 있어요. 간혹 참기 힘든 경우도 있었죠. 하지만 경영이념을 수정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저희 회사는 승진과 연봉을 결정하면서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습니다. 남녀 구분, 기혼자 ․미혼자 구분, 학력 구분을 하지 말자라는 겁니다. 남자라서, 좋은 대학 나왔으니까, 그런 배려는 없습니다. 저는 누구보다 학교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회사엔 4년제 대학부터 전문대 졸업자까지 고루 일하고 있습니다. 국민대 후배도 3명이 있습니다.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로서 열심히 일합니다. 능력 중심으로 평가 받는 사회가 사람 중심의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quot;&lt;/p&gt;

&lt;p&gt;&lt;br /&gt;
인터뷰를 마무리 하면서, 조금 엉뚱한 질문을 해봤다. 지금 이 순간, 스물두 살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시겠냐고. &quot;노는 걸 배우고 싶습니다. 우리 때는 뭘 해보고 싶어도 아르바이트에 바빴고 강당은 텅 비어있기 일쑤였습니다. 도서관에도 책이 충분치 않았죠. 지금 캠퍼스로 간다면, 사상이나 학술적인 동아리 말고 좀 노는 것을 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어디 가서 노래나 춤을 시키면 쑥스러워서 제대로 못 나섭니다. 일 하느라 바빴던 우리 세대의 일반적인 모습일 겁니다. 기타 동아리나, 체육 동아리 같은, 암튼 젊음의 낭만을 마음껏 즐기고 싶습니다.&quot;&lt;/p&gt;

&lt;p&gt;&lt;img border=&quot;0&quot; src=&quot;http://wfile.kookmin.ac.kr/data/board/0080/2014/02/54b8e49f396ae.jpg&quot; /&gt;&lt;/p&gt;

&lt;p&gt;&lt;br /&gt;
아쉬움이 묻어나는 솔직한 답변이었다. 이어서,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도 덧붙였다.&lt;br /&gt;
&quot;지금은 다양한 문화적인 혜택과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으니 적극적으로 누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취직이 전부는 아니잖아요. 물론 취업률이 대학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잣대이기는 합니다만, 그보다 자기 계발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면 좋겠어요.&quot;&lt;/p&gt;

&lt;p&gt;사원이 보는, 대표로서의 모습은 어떨까. 영업부에서 일하고 있는 강민석 사원(국민대 행정학과 졸업)에게 물었다.&lt;br /&gt;
&quot;대표님은 일에 대해서는 철두철미하시죠. 거의 완벽에 가깝게 일하기 위해 노력하십니다. 결단력, 추진력도 남다르신 분입니다. 동문으로서, 상사로서 배울 점이 많습니다.&quot;&lt;/p&gt;

&lt;p&gt;40여 분에 걸친 인터뷰를 마치고 동문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터뷰 때문에 미뤄 둔 외부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였다. 사람이 제일이다, 상식적인 생각을 실천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뛰듯이 걸어가는 동문의 뒷모습을 보면서 잠깐 든 생각이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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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조영문</author>
            <pubDate>Thu, 01 Jan 1970 09:00:0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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